제주 서귀포시를 사이에 두고 표선면(왼쪽 사진)과 대정읍 제주영어교육도시(오른쪽 사진)에서 교육의 차이에서 비롯된 상반된 통계가 나오고 있다. 표선면은 인구당 유입비가 1400만 원이지만, 제주영어교육도시는 10배가 넘는 1억7200만 원이다. 인구 증가로 지역소멸을 막는 게 성장을 위한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IB 프로그램 도입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표선면의 사례를 지역 균형발전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선면 사진=남선사 주지 도정 스님 제공, 제주영어교육도시 사진=JDC(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제공
표선면에서 주목해야 할 숫자는 인구수다. 지역소멸을 걱정하던 표선면은 유아, 청소년과 3040 학부모의 유입에 따라 인구 역전에 성공했다. 표선면 인구는 2019년 말 1만2284명에서 2022년 말 1만2526명으로 242명이 늘었다. 세대수는 228가구가 증가했다. 강연호 제주특별자치도 의원(국민의힘·서귀포시 표선면)은 “유입 인구의 80%는 육지에서 왔고, 20%는 도내 이동”이라고 했다.
이들 상당수는 국제바칼로레아 프로그램(이하 IB) 교육을 받기 위해 육지에서 온 초·중학생이라는 추정이다. 표선초 재학생은 IB를 도입한 2020년 238명에서 2022년 335명으로 97명이나 늘었다. 표선중도 같은 기간 94명이 늘었다. 전학생은 각각 95명과 36명이 증가했다.
IB가 이끈 인구 증가
표선면의 인구 증가는 표선 초중고교의 IB 도입 덕분이다. IB란 1968년부터 시작된 국제공인 교육프로그램으로 교육 목표와 일치하는 교육과정과 서술형 평가를 통해 학생의 진정한 성장을 추구한다(동아일보 2023년 1월 26일 자 기사 참조). IB에서 진정한 성장은 미래의 핵심 역량인 4C(협업, 소통, 창의, 비판적 사고)가 읽고, 쓰고, 말하기를 통해 길러지는 것을 말한다. IB는 진학 위주의 한국 교육을 대체할 대안으로 부상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다. 대구 92개교, 경기 25개교, 제주 12개교, 부산 10개교에서 한국어 IB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표선면의 인구 증가는 2020년 9월 표선초가 IB 관심 학교에 선정됐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IB 초등 프로그램은 관심-후보-인증학교를 거치면서 체계화된다. 주입식 교육과 경쟁 교육을 대체할 교육을 찾던 전국의 학부모들이 뛰어난 자연환경과 함께 자신만의 생각을 키워주는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주로 몰렸다.
네이버에 ‘국내 IB 학교 부모 카페’를 운영하는 네 자녀의 엄마 이혜선 씨도 그해 제주로 이주했다. 표선면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임호준 씨는 “2020년 말부터 육지에서 표선면의 방 2개 이상을 갖춘 빌라를 찾는 전화가 많이 왔다. 표선초 입학이 가능한 표선리 매물을 주로 찾았는데 수요가 넘쳐 연세(年貰)가 30∼60% 정도 올랐다. 현재 서너 곳의 건설 현장에선 100실 규모의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표선면 인구 유입비 1인당 1400만 원
표선면의 인구 증가는 가성비가 뛰어나다. 서귀포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대정읍의 제주영어교육도시와 비교했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 2019년 하반기부터 2022년까지 제주 IB 학교 12개에 들어간 총예산은 34여억 원으로 추산된다. 이 안에는 IB 사무국에 내는 분담금, 교사 지침 번역비, 교사 연수비, 교육 환경 시설 투자비, 교사 숙소 임차비, 산학 겸임 강사비, 홍보비 등 IB 프로그램을 위한 모든 비용이 들어 있다. 교사에 따라, 또 학급마다 다른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IB 프로그램 특성상 사교육의 지형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은 “IB 프로그램을 하는 제주 NLCS(노스 런던 칼리지 스쿨)의 경우 상위권일수록 사교육을 덜 받고 중하위권 학생일수록 학습 결손을 위한 사교육을 받는 경향을 보였다”면서 “상위권이 사교육에 시간과 비용을 더 쓰는 통계가 보고돼 온 국내 학교와 다른 패턴을 보인다”라고 했다.
제주영어교육도시 인구 유입비 1억7200만 원
제주영어교육도시는 2008년 노무현 정부 때 해외 유학과 어학연수를 대체하기 위해 시작된 사업으로 지금까지 1조9000억 원이 투입됐다.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 3,790,597㎡(약 115만 평)에 국제학교 7개를 유치해 2만 명의 상주인구가 목표였지만, 4개 국제학교 유치와 활동 인구(학생, 학교 종사자, 주민)는 1만1000명에 머물고 있다.제주영어교육도시가 1인당 인구 유입에 쓴 사업비는 1억7200만 원으로 세종시의 2배, 원주기업도시의 4.3배 등 전국 혁신도시 사업비 중에서 최고다. 1㎡당 사업비도 1.2∼5배가량 많다. 제주영어교육도시에 유입된 인구는 비싼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상류층일 가능성이 크다. 4개 국제학교 가운데 IB 프로그램을 도입한 2개 학교의 수업료와 기숙사비는 중고교 기준 연간 3600만∼4400만 원 사이지만, 여기에는 수백만 원에 이르는 교복값과 방과 후 클럽 활동비가 들어있지 않다. 자녀가 국제학교에 다니다 표선고로 옮긴 한 학부모는 “중고생 기준 연 교육비가 6000만∼8000만 원이다”라고 했다.
제주영어교육도시의 4개 국제학교에는 현재 4813명의 학생이 재학 중인데 이 가운데 내국인은 4444명이다(제주도교육청 자료).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는 2013년 제주영어교육도시 조성 이후 유학수지 절감 누적 금액이 2022년 기준 1조 1196억 원이라고 밝혔다. 유치원부터 고교 3학년까지 교육과정을 운영 중인 국제학교에는 일부 학년에 대기자가 많아 근처 국내 학교에 다니다 국제학교로 옮기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B, 한국 교육 해법 될까
한국 교육은 1995년 5·31 교육개혁 이래 어떤 혁신도 이뤄지지 않은 채 악화해왔다. 객관식 대입 시험과 문제 풀이 위주의 일방통행식 교육 탓이다. 누구나 교육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했던 것은 대입과 연계된 제대로 된 교육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입 시험만을 교육 정책의 골간으로 삼아 갑론을박을 벌이면서 교육의 근본을 바꾸지 못한다면, 280조∼360조 원을 쓰고도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는 출산 정책의 판박이가 될 수 있다. 한국 교육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아이들은 신음하고 있으며 에듀푸어가 양산되고 있다. 질문 능력이 강조되는 시대에 챗 GPT가 1분이면 답을 하는 걸 12년 동안 배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호환 동명대 총장은 “대학 선택의 기준이 점수와 지역인 것은 초중고 교육이 진학 위주인 탓도 있다. 지역대학의 혁신이 지역 발전의 마중물이 되려면 지금부터라도 초중고 교육과 대학 교육이 혁신적 동행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장민주 씨(표선고 3학년 박가영 학생 어머니)는 “가영이가 대학을 안 가도 된다”라고 말한다. 3년간의 IB 교육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졌기에 어떤 세상이 와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했다. IB가 교육의 주체인 교사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도 강점이다. 이혜정 소장은 “아이들이 변하는 걸 본 교사들이 노력하고 있다”라면서 “교과 내용 전문성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교사들이 IB를 통해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다”라고 했다. IB를 경험한 교사들이 학부모 민원이나 잡다한 공문 처리보다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와 수업 설계, 학습 부진아 끌어 올리기 등 수업과 직결된 영역으로 관심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과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 경쟁이 강조되는 IB 교육철학 덕분에 학교 폭력과 정신 질환 등 경쟁 교육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현저히 줄어든 것도 교사들의 교직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
한국의 IB 프로그램은 국가가 인정한 교육 가운데 하나로 IB 프로그램을 이수한 학생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서 기존의 교육 방법이 갖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IB 고교 과정(DP)을 이수한 학생은 수능 최저가 없는 수시 학생부종합전형과 논술 전형 등으로 국내 대학 진학의 문이 열려 있다. 2024학년도 대입 시험에선 44개 대학에서 2만 5055명을 △학생부종합전형 △학생부교과전형 △SW, 특기자, 실기전형 △논술 전형으로 뽑는다.
IB 확대와 지역 균형발전
IB 프로그램을 제주형 자율학교에 포함해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김광수 제주도교육감. 제주는 국제학교, 제주형 자율학교, IB 학교가 혼재된 교육의 샐러드 볼이다. 김 교육감이 당면한 과제는 3가지 다른 교육과정을 어떻게 조화시켜 제주 발전을 이끄는 동력이 되게 하느냐다. 제주도교육청 제공
IB를 통한 교육 가치의 극대화를 위해선 정치권의 관심과 지원이 꼭 필요하다. 강연호 의원은 “교육이 지역을 견인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IB의 확대를 위해 여야가 힘을 모으겠다”라고 했다. 강 의원의 계획은 야당 의원들로부터 지지받고 있다. 제주시 중심인 연동에 지역구를 둔 양영식 의원(더불어민주당)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IB 교육은 이에 부합한다”라면서 “도정 질의 때 교육감에게 지역구에 IB 초등학교 지정을 요구했다”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때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을 지낸 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제주시 갑)은 “제주는 인구 70만에 불과하지만, 다양한 지역 균형발전 정책을 펼 수 있을 정도로 지역 사정이 다르다. 여기서 교육을 통한 인구 증가 및 한국 교육의 개선점을 찾아내 지역 균형발전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오영훈 지사 및 중앙정치권에 제주가 갖는 의미를 알려 제주의 교육 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지역소멸 위기에 몰렸던 표선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구 증가 및 질적 변화는 ‘교육이 사람을 모을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긍정적인 신호다. 윤석열 정부는 교육과 대학이 지역균형발전의 핵심임을 천명하고 실행 중인데 ‘교육=지역 성장 동력’임을 증명하는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윤 정부가 강조하는 교육은 점수가 강조되는 것이 아닌 아이들의 미래에 필요한 역량을 키워주는 것이다. IB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한국 교육이 가졌던 잠재력을 새롭게 한다. 김대규 남원 용북중 교장은 “서남대 폐교로 지역소멸로 치닫고 있는 남원에 IB 교육이 도입되면 유아와 청소년을 모을 수 있어 지역 발전에 긍정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표선=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