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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밀어내는 ‘민폐 시위’ 바꿀 때 됐다 [오늘과 내일/박용]

입력 | 2023-03-28 21:30:00

토요일마다 시위로 소음, 교통체증 고통
주말 도심 즐길 권리 시민에게 돌려줘야



박용 부국장


지난 주말 오후 서울시청 광장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 외국인 단체 관광객을 우연히 만났다. 이날 주변 도로에서는 각종 시위로 차량들이 거북운행을 했다. 경찰이 교통을 통제했고, 횡단보도 빨간불도 한참 만에 바뀌었다. 한 외국인 관광객은 답답한 듯 가이드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이드는 “토요일(Every Saturday)마다 시위가 있다”며 “Every Saturday”를 한 번 더 강조했다. 주말마다 시위가 되풀이되는 서울. 외국인이 느끼는 첫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토요일 서울 도심은 평범한 시민의 것이 아니다. 남대문부터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세종대로 주변은 ‘퇴진’ ‘구속’ 등과 같은 정치 구호가 적힌 현수막, 각종 단체의 깃발이 나부낀다. 그 단체가 그 단체들이다. 시민들은 인도를 이들에게 내주고 길가로 밀려난다. 특정인에 대한 비방과 음모론으로 가득찬 현수막을 지날 때는 아이들 눈을 가려야 한다. 시위는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는 일인데 시민들이 눈을 가려야 할 정도면 무슨 소용인가.

시위가 시작되면 ‘소음 경쟁’이 벌어진다. 집회 주최 측은 대형 공연장에서 봄 직한 전광판과 무대를 설치하고 크레인으로 대형 스피커를 공중으로 끌어올려 귀청이 찢어지도록 철 지난 운동권 노래나 군가를 틀어댄다. 광화문과 남대문 양쪽에서 서로 다른 단체가 시위를 하면 중간에 낀 시민들은 귀를 막고 걸어야 할 정도로 시끄럽다. 시위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널리 전하기 위한 것인데 시민들이 귀를 막고 걷는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시민들이 눈과 귀를 막게 하는 ‘민폐시위’ 문화를 바꾸려면 주최 측부터 시민 친화적 시위를 더 고민해야 한다. 2020년 6월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BLM’(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를 취재하면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 울림을 갖는지 실감했다. 휴대용 확성기를 든 한 시민이 구호를 외치면 다른 시민들이 그의 마이크가 돼 한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함께 걷고 구호를 외치며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대형 스피커가 없어도 거리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뉴욕에선 공공기관 비리를 비판하는 시위에 ‘부패’를 상징하는 쥐 모양의 대형 풍선 모형이 등장한다. 소음 대신 상징물을 통한 시각적 자극으로 주위를 환기하는 시위 방식이다.

당국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되 소수가 거리를 독점하고 시민을 밀어내지 않도록 관리할 책임이 있다. 평균 소음을 측정해 단속하는 방식으로 소음시위를 근절하기 어렵다면 유럽처럼 실시간 소음측정기를 설치하고 소음이 기준치를 넘는 시간에 비례해 벌금을 내게 해 주최 측에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

정치권도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다”는 말로 넘어가거나 민폐시위에 어물쩍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가 역할을 다했다면 애초 각종 단체들이 거리로 나올 일도 없었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거나 세비를 올리는 데 정신을 쏟을 게 아니라 의사당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특정 세력이 거리와 광장을 장악하고 제 목소리만 높이면 사회 구성원 간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자본은 약해진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수준은 조사대상 167개국 중 107위다. ‘사회적 자본 후진국’은 같은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해도 선진국에 비해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뉴욕 맨해튼대로는 시민 축제나 순직 경관 및 소방관 장례식 등 공동체를 위한 행사를 위해 차단된다. 특정 세력과 이익집단이 시민을 밀어내고 도심을 점거하는 일이 반복되진 않는다. 우리도 이젠 시민에게 ‘도심의 봄’을 돌려줄 때가 됐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