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상처가 때로는 예술의 질료가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상처의 그러한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일화가 나온다.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다.
주인공은 유년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와 같이 있다가도 잘 시간이 되면 위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면 침대로 들어가 어머니가 올라와 입맞춤을 해주기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아버지가 불안의 요인이었다. 아버지는 예민한 아이에게 날마다 입맞춤을 해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가 올라오지 않자 그는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어두컴컴한 계단에서 15분 정도를 기다렸다. 드디어 어머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램프를 들고 뒤따라오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이 의외였다.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화난 표정을 짓다가 어머니가 그를 위해 변명을 하자 이렇게 말했다. “마침 당신이 잠이 안 온다고 했으니 같이 가구려. 저 애 방에 있어 주오.” 그는 혼나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그토록 원하던 것을 얻었다. 어머니와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충격이었다.
그날 밤 그는 많이 울었다. 행복해야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화자가 그 기억을 소환한 것은 지금도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은 나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날로, 슬픈 날로 남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어 말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뇨, 괜찮아요. 여기서 주무시지 마세요.’ 아버지가 평소처럼 혼냈다면 괜찮았을까. 그거야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병이 아버지가 그날 보여준 일관성 없는 행동에서 시작됐다고 믿는다. 아버지의 행동이 그를 심리적 분열과 신경증으로 내몰았다는 말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은 상처였다. 역설적이게도 그 아픈 상처가 위대한 예술의 질료였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