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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피해자 향한 지독한 편견 깨고 싶었어요”

입력 | 2023-03-29 03:00:00

‘완벽한 피해자’ 펴낸 김재련 변호사
“10년 넘게 아무에게도 말못한 고통
‘피해자다움’이란 존재하지 않아”



최근 에세이 ‘완벽한 피해자’를 출간한 김재련 변호사는 “성범죄 피해자에게 일상을 살 용기를 주는 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는 공감의 한마디라는 걸 판사와 검사, 변호사, 수사관들은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오늘 법정에서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열두 살 소녀와 헤어지고 오시길 바랍니다.”

2021년 11월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51)는 성폭력 사건 고등법원 판결 선고를 앞둔 피해자 A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A 씨는 12세 때 사촌에게 강간 피해를 입었지만 10년 넘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말하면 너희 부모님이 죽을 것”이라는 가해자의 말이 두려워서였다. A 씨는 성인이 된 뒤 어렵사리 김 변호사를 찾아왔다. 지난한 수사와 재판을 앞둔 그에게 김 변호사는 “오늘의 당신이 아니라 그날의 소녀가 법정에서 목소리를 내주면 된다”고 다독였다. 3년 넘게 이어진 법정 싸움 끝에 유죄 판결이 내려지던 날, A 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덜 힘들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을 비롯해 20년 넘게 여성·아동·청소년 등 성범죄 피해자를 대리해온 김 변호사가 에세이 ‘완벽한 피해자’(천년의상상)를 최근 펴냈다. 서울 서초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27일 만난 그는 “세상이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을 완전하게 갖춘 피해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책 제목을 이같이 정했다”며 “성범죄 피해자를 향한 지독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친부에게 수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던 B 씨 등 피해자들을 대리하면서 편견 섞인 질문들을 맞닥뜨렸다. ‘진짜 성폭행을 당했다면 왜 그때 신고하지 않았는지, 성폭행 피해를 입고도 왜 가해자에게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냈는지, 이런 피해를 입고도 어떻게 멀쩡하게 대학과 직장을 다니고 있는지….’ B 씨의 친부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피해자가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아버지에게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들여다봐야 한다”며 “어린 시절부터 친부의 가정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는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피해자에 대한 정신 감정 결과 ‘학대순응증후군’이란 진단이 나왔다. 법원은 친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며 이렇게 판시했다. “피해자는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진 폭언과 폭력, 성폭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심리적인 항거 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이런 판결문을 받아 들 때 피해자 대리인으로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피해자가 자기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피해자와 헤어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니까요.”(김 변호사)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