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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만드는 건 제자리서 혼신 쏟는 이들[오늘과 내일/손효림]

입력 | 2023-03-30 21:30:00

군무까지 빛난 파리오페라발레단 ‘지젤’
한 명 한 명의 땀, 탁월함 빚어냄을 실감



손효림 문화부장


황홀함 그 자체였다. 세계 최정상 발레단인 파리오페라발레단(BOP)이 30년 만에 전체가 내한해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이달 초 선보인 ‘지젤’은 그랬다.

11일 오후 2시 공연에서 지젤 역을 맡은 BOP의 간판스타 도로테 질베르는 연인과 사랑에 빠진 기쁨, 배신당한 후의 광기, 영혼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이를 끝내 지켜내는 애절함을 완숙하게 연기했다. 남자 주인공 알브레히트 역을 맡은 기욤 디옵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다리를 앞뒤로 빠르게 32회 교차하는 난도 높은 기술을 깔끔하게 선보여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디옵은 수석무용수 위고 마르샹의 갑작스러운 무릎 부상으로 대신 무대에 올랐다. 디옵은 BOP의 떠오르는 신예지만, 남자 주역이 교체됐다는 공지가 뜨자 취소 표가 꽤 나올 정도로 그에 대한 국내 관객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탄탄한 기량으로 단숨에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공연이 끝난 후 박수와 환호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자 무대에 올라 감사 인사를 하던 호세 마르티네즈 BOP 예술감독이 말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무용수의 삶에는 매우 희귀한 순간이 있습니다. 꿈의 실현인 에투알(수석무용수) 지명의 순간이죠.” 그리고 디옵을 에투알로 깜짝 지명했다. 354년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最古) 발레단 BOP 최초로 흑인 에투알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올해 쉬제(솔리스트)로 승급한 그가 ‘프리미에 당쇠르’(제1무용수)를 건너뛰고 에투알이 된 것이다. 에투알은 전체 단원의 10% 이내에 부여된다. 프랑스인 어머니와 세네갈인 아버지를 둔 디옵은 놀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질베르와 동료들을 차례로 껴안았다. 2년 전 박세은이 BOP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에투알에 지명됐을 때도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이라는 뜻의 에투알처럼, 말 그대로 별의 순간을 맞은 이를 보니 가슴이 찡했다.

질베르와 디옵 못지않게 눈을 사로잡은 건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이었다. 남자를 유혹해 죽을 때까지 춤추게 만드는 처녀 귀신 윌리들이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하얀 망사의 로맨틱 튀튀를 입고 추는 ‘윌리들의 군무’는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백조의 호수’의 호숫가 군무, ‘라 바야데르’의 망령들의 왕국 군무와 함께 ‘3대 발레 블랑’(하얀 발레)으로 불린다. 24명의 윌리는 두 발끝으로 소리 없이 빠르게 이동해 마치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대열을 정교하게 유지한 채 중력을 거스른 듯 일제히 가볍게 뛰어오르는 모습은 영혼을 연기한다는 걸 직관적으로 느끼게 했다.

출산으로 이번 무대에 서지 않은 박세은이 지난해 7월 BOP 주역급 무용수들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선보인 ‘파리오페라발레 2022 에투알 갈라’가 개개인의 탁월한 기량을 선명하게 각인시켰다면, ‘지젤’은 빼어난 이들이 제대로 빚어낸 하모니였다.

윌리로 이번 무대에 선 한국인 강호현(쉬제)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연습했다고 한다. 낮에 식사할 시간이 없어 저녁에 두 끼를 몰아서 먹을 때도 있을 정도로 단련을 거듭했다. 그처럼 무용수 한 명 한 명이 빈틈없이 제 역할을 해냈기에 압도적인 무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군무 없이 주연 없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단원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다. 잠깐 무대에 오르더라도 그 시간을 제대로 꽉 채울 수 있게 연습해야 한다는 당부다. 비단 무대뿐일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탈 없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각자 자리에서 묵묵히 애쓰는 이들 덕분이다. 감동을 주는 모자이크 작품은 적당히 해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