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문화부 차장
“한국 그림책의 수준이 짧은 기간에 놀라울 정도로 성장한 만큼, 작가의 저작권 보호 등 출판 환경 역시 제대로 정립돼야 해요. 출판물뿐 아니라 2차 저작물 개발과 사업이 함께 커지고 있지만, 작가의 권리 보호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니까요.”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스웨덴 아동문학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2020년)을 수상한 백희나 작가가 전화 통화에서 한 말이다. 통화는 지난달 7일 국내 작가 4명이 아동문학계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볼로냐 라가치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이뤄졌다. 수상자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면서도 백 작가는 혹여나 자신이 후배들에게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건 아닌지 늘 미안하다고 고백했다.
백 작가는 신인 시절인 2003년 그림책 ‘구름빵’을 출간했다. 출판사 한솔교육과 2차 콘텐츠까지 모든 저작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850만 원에 ‘매절(買切)계약’을 했다. 이후 지원금을 포함한 백 작가의 총수입은 고작 1850만 원에 그쳤다. 반면 출판사는 구름빵이 40여만 부 팔리며 20억 원가량의 매출을 올렸다. 구름빵은 해외 수출 및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2차 콘텐츠로 제작됐지만 이 과정에서 백 작가는 배제됐다. 결국 백 작가는 저작권 침해 금지 소송을 제기했지만 2020년 재판에서 패소했다.
이 작가의 죽음을 계기로 신인 창작자에게 저작권을 영구 양도받는 식의 출판계 계약 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결국 정부는 ‘제2의 검정고무신’을 막겠다고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5개 분야 표준계약서 82종을 전면 재점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저작권법에 불공정계약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점에서 정부의 표준계약서 재점검 역시 문제를 바로잡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산업은 창작자의 저작권을 보호해주는 풍토에서 꽃필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세계에서 K콘텐츠가 급부상하고 있지만, 국내 저작권 보호 시스템이 국제적인 수준인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소설 ‘해리포터’로 인세와 영화 및 관련 상품 로열티를 통해 1조 원 이상을 벌어들인 영국 작가 조앤 K 롤링은 무명시절 저작권 대행업체를 통해 저작권을 인정받고 출판사도 구했다. 롤링이 영국 작가가 아닌 한국 작가였다면 어땠을까. 제2의 백희나, 이우영이 되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다. 창작자가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문화강국도 공허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김정은 문화부 차장 kimj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