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상 속 심리적 궁금증이나 고민이 있다면 이메일(best@donga.com)이나 댓글로 알려주세요. 기사로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드라마 ‘더 글로리’ 주인공 문동은은 자신을 괴롭힌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18년 동안 고군분투하며 완벽한 복수를 준비한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의 복수를 응원하며 대리만족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선 완벽한 복수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 아닐까. 넷플릭스
SBS 드라마 ‘모범택시’에서는 학교폭력, 사이버 음란물 유포, 사이비 종교, 보이스 피싱, 해외 취업 사기 등 각종 사회 범죄를 총망라하며 피해자의 억울함을 조명한다. 복수 대행사인 ‘무지개 운수’의 모범택시 운전기사 김도기(배우 이제훈) 등이 나서 피해자 대신 앙갚음을 해준다.
드라마 주인공들의 ‘사이다 복수’는 그야말로 속이 뻥 뚫리는 맛이 있다. 악인은 많고, 복수를 갈망하는 피해자의 분노는 큰 데 비해 현실에서 정의 구현은 그만큼 어렵고 더디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복수할 때 작용하는 심리적 기제를 살펴보면 현실에서 깔끔하고 시원한 복수를 달성하기란 더 어려워 보인다.
달콤 시원 ‘사이다’인 줄 알았는데…뒷맛이 씁쓸
복수한 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뇌에서 일종의 보상을 받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2004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스위스 취리히대 연구팀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복수할 때 뇌에서 보상받는다고 느끼는 배측 선조체(dorsal striatum)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영역이 더 많이 활성화된 사람일수록 더 강한 보복을 한다. ‘복수=즐거움’이라는 공식이 어느 정도는 맞는 셈이다. 복수를 결심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배측 선조체. 사이언스지
복수 뒤 따라오는 불쾌하고 오묘한 감정
케빈 칼스미스 미국 콜케이트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복수의 역설적인 효과에 관해 연구했다. 칼스미스 교수는 실험참가자 48명을 4인 1조로 나눠 컴퓨터 게임을 시켰다. 연구팀은 4명 중 1명에게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다른 팀원이 열심히 벌어오는 게임 상금을 나눠 갖는 얌체 역할을 맡겼다.연구팀은 각 팀의 얌체들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게임 상금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나머지 팀원 3명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얌체들의 돈을 빼앗는 복수 기회를 주거나 △복수 기회를 주지 않거나 △복수는 하지 않되 복수했을 때를 상상해 보도록 했다. 10분 뒤 세 그룹의 정서 반응을 측정했다. 세 그룹 가운데 가장 기분이 좋은 그룹은 어느 그룹이었을까?
놀랍게도 복수하지 않은 그룹이 가장 기분이 좋았다. 기쁨, 만족 등 긍정적 정서가 나머지 두 그룹에 비해 훨씬 높았다. 복수를 한 그룹은 복수심과 짜증 등 부정적 정서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돈을 많이 빼앗아 복수를 강하게 한 사람일수록 부정적 정서가 높았다.
보복은 보복을 낳고…서로 “내가 피해자”
복수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형평성 문제 때문이다. 피해자는 처음 자신이 본 피해보다 더 많이 앙갚음해야 공평하다고 인식하는 반면 보복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피해를 준 것에 비해 조치가 과하다고 느껴 다시 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작은 불씨가 점점 큰 보복을 낳으면서 전쟁으로 이어진 수많은 역사적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복수의 형평성이 어긋나는 사례는 일상에서도 많이 일어난다. 특히 도로 위에서 옆 차가 끼어들거나 경적을 울렸다고 해서 과한 보복 행위를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동아일보 DB
그 결과 참가자들은 자신이 보복당할 때 훨씬 불공평하고 화가 난다고 느꼈다. 반대로 자신이 복수할 때는 분노는 느꼈으나 공평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컸다. 스틸웰 교수는 “복수를 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모두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한다”며 “이 때문에 서로 공정하다고 인정하고 상황을 정리하기 점점 어려워진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의 힘
물론 복수 뒤 ‘비교적’ 기분이 좋은 경우도 있다. 마리오 골비처 독일 뮌헨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언제 만족스러운 복수가 이뤄질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실험참가자들에게 퀴즈를 풀게 하고, 다 맞춘 이들에게 짝지어준 파트너와 둘이 알아서 나눠 가지라며 25유로짜리 상품권을 줬다. 이어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바뀐 결과를 받은 파트너의 반응이 담긴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 그룹에는 바뀐 결과에 대해 항의하며 화를 내는 내용이, 다른 그룹에는 자신이 처음에 이기적으로 군 것을 사과하는 내용이 전달됐다.
그런 뒤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상금 배분 결과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물었다. 당연히 사과 메시지를 받은 그룹이 화를 내는 메시지를 받은 그룹에 비해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나 사과받은 이들보다 실험 결과에 더 만족하는 이들은 처음부터 보복하지 않겠다고 답한 40%의 참가자들이었다. 복수를 안 했을 때 가장 만족했고, 복수를 한 경우라면 사과받았을 때 그나마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골비처 교수는 “가해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해야 복수가 성공할 수 있다”며 “가해자에게 단지 불이익을 주는 것만으로는 복수에 충분히 만족하기 어렵다”고 했다.
통쾌하지만은 않은 복수의 역설
이처럼 안타깝게도 ‘더 글로리’의 문동은이 복수를 끝내더라도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상당히 많다. 18년간 “연진아”로 시작하는 분노의 편지를 수없이 썼고, 그의 방은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사진으로 도배돼 있다. 18년 동안 되새김질한 분노와 적개심은 복수의 원동력이자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에너지였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하자면 문동은은 끝까지 박연진에게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한다.드라마 ‘더 글로리’의 문동은의 집은 온통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사진으로 도배 돼 있다. 복수를 결심하면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계속 증폭된다. 넷플릭스
최고야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