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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속성 파악하면 명화(名畫)가 제대로 보인다”

입력 | 2023-04-03 13:55:00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임현균 박사
‘내 머리 속 미술관’에서 미술 작품 제대로 보고 내 것으로 만드는 비결 소개




“새로운 자극으로 잠자는 뇌를 깨워 명화(名畵)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결국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임현균 박사(의료측정센터 책임연구원)는 최근 ‘내 머릿속 미술관(지식의 날개, 346쪽)’이라는 책을 펴낸 배경에 대해 3일 이 같이 설명했다. 임 박사는 “그림을 ‘보이는 대로 보지(to see) 말고, (잘 안 보이는 것까지) 보려고(to look for)하라’고 제안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 책은 뇌과학과 인지과학을 활용해 명화 감상의 실상을 분석했다.

임 박사는 과학자, 명강사, 방송진행자 등으로 다채롭게 활동하는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의 팔방미인이다. 뿐만 아니라 직접 그림을 그려 개인전도 여러 번 열었다. 화가이면서 미술 이야기꾼인 임 박사가 인간의 머릿속에서 어떤 미술관을 발견했는지 들어봤다.

―책이 장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선 이 그림에 몇 명의 농부가 등장하냐고 묻고 있는데‥.

“대부분 서너 명으로 기억한다. 앞쪽의 이삭을 줍는 세 여인 때문이다. 우리의 관찰력은 이처럼 건성이다. 멀리 보이는 풍경을 자세히 살피면 농부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머릿속 미술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임현균 박사는 “사람들은 배경을 잘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이 그림에 등장하는 농부는 대개 서너명 정도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암현균 박사 제공.

―이 그림의 주제가 평화로운 전원 예찬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농부의 힘겨운 삶에 대한 연민과 분노가 주제다. 밀레는 농촌의 아름다움 위에 농부들의 고된 삶을 상징적이며 은유적으로 표현한 바르비종파의 주요 멤버였다. 그는 한가로운 농촌풍경을 즐겨 그린 서정적 화가가 아니라 고달픈 농부의 현실에 가슴 아파한 저항적 화가였다.”

―그런 그림의 주제가 어디에 표현돼 있나.

“그림에서 멀리 보이는 원경을 보면 극심한 노동을 계속하는 수많은 농부들과 이들을 감시하는 말 탄 관리인이 잘 대비돼 있다. 그 주변에는 농부들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대저택들이 늘비하다. 이 그림을 결코 목가적인 풍경화로만 보기 어렵게 하는 장면이다.”

―왜 우리는 이 그림을 제대로 못 본 걸까.

“우선 밀레가 어떤 화가였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게 문제였다. 여기에다 농촌은 한가하고 평화롭다는 인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 그림을 다시 대했더라도 달리 봤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는 뇌의 효율성 전략때문에 기존 정보를 재확인 하는데 그쳤을 공산이 크다. 우리의 머릿속 미술관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이삭줍는 여인들’의 배경인 원경을 자세히 보면 노동하는 농부들과 감시하는 말 탄 관리인이 보인다. 임현균 박사 제공. 

―전공이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기계공학과 생체역학, 의공학을 전공했다. 뇌졸중, 척수 손상, 협심증, 혈압계, 시각, 아동운동발달, 사이버 멀미(뇌파) 등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왔다. 다소 치기 어린 생각이 미술에 다가가게 했다. 해외 학회에 가서 강연을 듣다보면 유명 연구자들이 그림 한 장을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청중과의 어색함을 푸는 방식(icebreaking)이었는데 멋져 보였다. 나도 언젠가 그램을 배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개인전도 열었는데.

“2016년 정부부처에 파견 나갔을 때 저녁에 소일삼아 그림을 배웠다. 돌아와서 매주 토요일 오전 대전의 한 미술 동아리에서 모델을 놓고 데생을 한 뒤 밑그림을 집으로 가져와 완성한다. 외부 전시회를 포함해 그동안 개인전을 네 번 개최하고 단체전에 여섯 번 참가했다. 이번 책에 직접 그린 그림을 많이 실었다.”

―화가마다 작업 테마(소재, 오브제)가 다르다.

“한글과 세종대왕을 주된 테마로 삼는다. 미국에는 성조기와 알파벳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한글을 소재로 잘 삼지 않는다. 표현추상에도 관심이 생겨 작품이 점차 변화하고 있다.”

―직접 그리면 그림에 대한 이해도 다른가.

“‘손으로 본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려보지 않으면 신비로운 색을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6개월 후부터 명화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기가 그 이론 공부에 도움을 줬고 거꾸로 명화 분석이 그림을 그리는데 힘이 됐다. 그림을 그리다 벽에 부닥쳤을 때 명화는 많은 힌트를 준다.”

―‘무시기’ 레터에 대해 설명해달라.

임현균 박사는 8년째 그림을 그리고 개인전도 여러 번 열었다. 그는 그림 그리기가 미술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겜 만든다고 말한다. 임현균 박사 제공.  

“그림을 그리다 보니 화가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해졌다. 나의 궁금증을 해소만 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매일 3~4시간씩 투자해 한주에 한명씩의 화가를 파헤쳤다. 이를 ‘무시기(무작정 시작한 미술이야기)’란 이름으로 지인들과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제 무시기 레터를 받는 사람들이 3000명으로 늘었다.”

―그림에 대한 뇌과학적 분석에 도전했는데.

“화학자가 물감과 색에 대해 쓰거나 의학자가 정신문제와 질병 등을 그림 속에서 발견해 책으로 펴냈다. 무시기 내용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뇌과학과 인지과학을 통해 미술 이야기를 풀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산업자원부 정부 과제(가상현실에서의 멀미측정)를 맡아 뇌파를 측정하고, 관련 논문을 쓰면서 뇌과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인공지능(AI)이 그린 그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시기별로 새로운 도구가 등장했다.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을 만들어 멀리 보았고, 화가들은 새로운 물감과 장비로 그림을 그렸다. 예전부터 미술의 대가들도 카메라 옵스큐라 라는 장비를 써 비례를 맞췄다. 사진기가 나왔다고 그림이 망하지 않았다. AI는 새로운 도구일 뿐이다. 인간은 새로운 도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림을 지금까지와 달리 보려면.

“우리는 그동안 그림을 보여 지는 대로 보고 살았다. 굳이 변명하자면 뇌의 속성을 잘 간파하지 못해 그런 측면이 있다. 그림을 다른 각도에서 감상하려면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며 뇌가 기존의 정보를 수정하도록 깨워야 한다. 밀레에 대해 기존과 다른 지식과 정보를 알고 나니 어떤가. 그림을 달리 보이지 않은가.”

임현균 박사가 최근 펴낸  ‘내 머리속 미술관’. 임현균 박사 제공

―그림을 나의 것으로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림 속의 디테일 각각에 자신의 서명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따라 그려보면 더 좋다. 그러면 그 디테일 하나하나가 나의 것으로 각인된다. 기억하는 사람이 바로 주인이다. 멜로디를 흥얼거리면 애창곡이 되고 나의 노래가 되는 원리다. 기억하면 비로소 그 명화는 나의 그림이 된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