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아픔 잊고 팀 우승-美진출 두 마리 토끼 쫓는 키움 이정후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 이정후(키움)가 지난달 27일 다부진 표정으로 시즌에 임하는 각오를 밝히고 있다. 이정후는 올 시즌 후 미국 진출을 노린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한국 야구 대표팀은 지난달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한 수 아래 전력으로 평가받던 호주에 7-8로 진 데 이어 일본에는 콜드게임을 간신히 면하며 4-13으로 패했다.
하지만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이정후(25·키움)는 빛났다. 일본 최고 투수들을 상대로 주눅 들지 않고 자신 있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매 경기 좋은 타구를 만들어냈다. WBC 대회 타율은 0.429(14타수 6안타)였다.
올 시즌 후 이정후는 포스팅 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도전한다. 그는 “이번 대회 실패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2026년 열리는 제6회 WBC에는 ‘코리안 빅리거’로 출전하고 싶다. 2030년과 2034년에도 빅리거로 WBC에 출전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항상 남들보다 일찍 운동장에 나오는 것 같다.
“팀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나와서 할 게 많다. 웨이트트레이닝도 하고, 잔부상도 치료하고, 배팅도 좀 해야 한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다. 매년 이렇게 해 왔고, 이렇게 하면서 성적도 잘 나왔기 때문에 일종의 루틴이 됐다. 경기에서 잘하게끔 준비하는 저만의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충분히 훈련을 많이 하고 있지 않나.
“저는 훈련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또 그에 따른 결과가 좋으면 자신감을 더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훈련을 하면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든다. 그런 성취감이 자신감으로 연결되고, 자신감이 있으면 성적도 좋아지는 것 같다.”
―우상으로 여기는 스즈키 이치로(일본·은퇴) 같은 선수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던데….
“훈련한 대로 결과가 나와 주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타자로서 할 수 있는 건 방망이로 공을 정확히 맞히는 것까지다. 그게 안타가 될지, 파울이 될지, 잘 맞았는데 야수 정면으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2017년 키움에 입단했을 때부터 좋은 선배님들이 많았다. 박병호(KT), 서건창(LG), 이택근(은퇴) 같은 선배님들이 나만의 루틴을 가지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래야 슬럼프가 와도 빨리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선배님들은 몸으로 먼저 보여주셨다. 그렇게 따라 하다 보니 나만의 루틴이 생긴 것 같다.”
―WBC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한국은 세 대회 연속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저희 실력이 부족했다는 것 맞다. 하지만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다. 따지고 보면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 했다는 게 실력이긴 하다. 분명히 더 잘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한국 선수들은 상당히 긴장했던 것 같다. 반면 일본 선수들은 단체회식도 하는 등 팀 분위기가 훨씬 좋아 보였다.
“긴장이라는 것은 선수로서 이겨내야 하는 부분이었다. 어느 팀, 어떤 선수든 긴장은 다 했을 거다. 다만 다른 나라 선수들은 긴장 속에서도 자기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 선수들에게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실력을 키워 잘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감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 좋은 투수들과 좋은 타자들이 없는 게 아니다. 이번 대회 실패를 교훈 삼아 지금부터 다시 준비해야 한다. 나부터 더 열심히 하겠다.”
“정말 대단한 선수다. 오타니는 대회 내내 모든 언론, 모든 팬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심지어 같은 선수들도 경기 전 그의 훈련 모습을 ‘우아∼’ 하면서 쳐다봤을 정도다. 그런데 오타니는 그런 부담감을 다 이겨내고 경기에서도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더라. 자신을 믿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거기까지 가기엔 준비 과정이 정말 혹독했을 것이다. 투수도 하고, 타자도 하니 두 배 이상 힘들었을 텐데 그걸 다 이겨냈다. 정말 대단하다.”
―일본 투수들을 상대한 뒤 ‘난생처음 보는 공이었다’고 한 말이 화제가 됐다.
“한국과의 경기에 일본의 두 번째 투수로 나왔던 왼손 투수 이마나가 쇼타(DeNA)가 인상적이었다. 시속 150km대의 패스트볼을 던졌는데 사실 그 정도 스피드는 한국에서도 많이 봤다. 놀라운 것은 공의 스핀량이었다. 그렇게 회전이 많은 공은 처음 봤다. 만약 포수가 받지 않는다면 백네트까지 뚫고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샌디에이고에서 뛰고 있는 일본인 투수 다루빗슈 유가 이정후 선수의 소셜미디어에 ‘함께 뛸 날을 기대한다’는 글을 올렸던데….
“한국에 와서 쉬고 있다가 그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루빗슈는 MLB에서도 1선발로 뛰는 선수 아닌가. 그런 대투수가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개인적으로 너무 감사했다. 자신감이 생기는 계기가 됐다.”
―일본 중심 타자 요시다 마사타카(보스턴)와는 방망이를 교환하며 우정을 나눴다.
이정후(사진 왼쪽)와 일본인 타자 요시다 마사타카(보스턴)는 지난달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 기간에 배트를 교환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요시다 인스타그램 캡처
―2017년 신인왕으로 시작해 지난해 MVP까지 됐다. 스스로도 이렇게 잘될 거라 생각했나.
“사실은 프로에 입단한 뒤 1년만 뛰고 군대에 다녀오려 했다. 여느 선수들처럼 군대를 빨리 다녀온 뒤 주전 경쟁을 해서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상황들이 많이 바뀌어 버렸다.”
―올 시즌이 끝나면 MLB 진출을 노리는데 언제부터 미국행을 결심했나.
“MLB는 원래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2021년 도쿄 올림픽이 계기가 된 것 같다. 올림픽에서 좋은 투수들의 공을 쳐 보면서 본격적으로 꿈을 키우게 됐다. 그리고 샌디에이고에서 뛰고 있는 (김)하성이 형의 영향이 컸다. 하성이 형이 키움 소속일 때 팀에서 가장 친했는데 형이 MLB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해주신다. 그런 얘기를 자꾸 들으면서 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프링캠프부터 많은 MLB 팀이 이정후 선수에게 관심을 보여 왔다. 어떤 자세로 임하려 하나.
“만약 MLB에 가게 되면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모든 걸 쏟아부을 것 같다. 말 그대로 신인의 자세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제가 가서 잘해야 또 다른 한국 선수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올 것 같다. (김)하성이 형도 작년 유격수로 맹활약하면서 한국 선수도 내야 수비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나. 저도 저 나름대로 한국 선수의 좋은 면을 보여주고 싶다. 악착같이 할 자신이 있다.”
―지난해 타격 5관왕(타율 안타 타점 장타율 출루율)에 오르고도 지난겨울 타격 폼을 간결하게 수정했다.
“선수로서 매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꼭 MLB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폼을 바꿔보고자 했다. 미국 애리조나 캠프 때만 해도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타격을 하면서도 내가 자세에 신경을 쓰고 있더라. 그런데 WBC와 시범경기 등을 거치면서 이제는 새 타격 폼에 완전히 익숙해진 느낌이다. 타격 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투수들과의 대결에만 집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올해는 무조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 가서 마지막 경기를 지고 난 뒤의 감정을 잘 기억하고 있다. 올해는 무조건 끝까지 가서 최후의 정상에 서는 게 목표다. 작년에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셨던 팬들이 올해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올 시즌 후 팬분들과 잠시 이별하는 게 목표다.”
이정후
△ 1998년 일본 나고야 출생
△ 광주서석초-휘문중-휘문고
△ 2017년 한국 프로야구 신인상
△ 2018∼2022년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 2022년 타격 5관왕(타율 안타 타점 장타율 출루율), 최우수선수(MVP)
△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2021년 도쿄 올림픽, 2023년 WBC 국가대표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