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하이틴 로맨스 같은 게 아니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묻는 언론의 질문을 냉랭하게 받아쳤다. OPEC+가 지난해 10월 하루 200만 배럴의 원유 감산을 결정한 것을 놓고 이를 주도한 사우디와 미국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던 때였다. 미국 중간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사우디가 조 바이든 행정부의 “면전에 일격을 가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워싱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OPEC+가 그제 추가 감산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에도 사우디가 주도한 것으로, 하루 116만 배럴 규모다. 미국이 애써 시도해온 인플레이션 대응을 보란 듯이 무력화시키는 결정이다. 그새 러시아, 중국과 더 밀착한 사우디는 미국의 에너지 정책에 정면으로 맞설 태세다. 사우디는 가스프롬을 비롯한 러시아의 주요 국영기업들에 5억 달러를 투자했고, 중국과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준회원 가입과 ‘룽성 석유화학’ 투자 등을 통해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오랜 동맹인 미-사우디의 밀월관계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이 셰일오일, 셰일가스 개발로 대(對)중동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상황에서 이란과의 핵협상에 나선 것을 사우디는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을 놓고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는 ‘왕따(pariah)’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양국은 인권 문제로도 충돌했다. 미국 의회가 사우디에 대한 군사지원 중단 논의에 나섰을 때는 ‘미국 국채 매각’ 카드로 맞섰다. 사우디가 국부펀드(PIF) 등을 통해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는 1200억 달러가 넘는다.
▷미국과 사우디의 갈등으로 기름값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환율 변동 폭이 커지고 인플레이션도 재차 심화할 조짐이다. 사우디가 원유 대금의 위안화 결제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외신 보도도 나온다. 원유 거래가 달러만으로 이뤄져 온 ‘페트로 달러’ 체제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새 전선 짜기에 바쁜 사우디의 행보에 미국도 손대지 못하는 사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안보 지형까지 바뀌는 판이다. 고유가의 유탄을 맞는 비산유국들의 주름살도 늘어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