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에서 식사한 뒤 서빙해준 직원에게 ‘팁(tip)’을 줘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한국이라면 팁 주는 게 어색하겠지만 미국에선 팁을 주지 않는 게 무례한 행동으로 통하죠. 팁 자체가 곧 미국 문화인 건데요.
그런데 팁은 얼마가 적당할까요. 요즘 미국에선 서비스 가격의 20%가 기본이라는데, 정말 적정한 게 맞을까요? 어디까지가 팁의 대상일까요. 드라이브스루로 커피를 주문한다면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직원에게 팁을 줘야만 하는 걸까요.
다른 나라에서는 별로 고민할 일 없는 팁 문화를 두고 미국에서는 갑론을박이 한창입니다. 이른바 ‘팁플레이션(Tipflation, 팁+인플레이션)’ 현상 때문인데요. 미국의 팁을 둘러싼 기술적, 경제적, 심리적 이슈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너도 나도 팁을 달라고 한다. 미국에선 ‘팁플레이션’이 소비자들의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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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팁’의 넛지효과
오리건주에 사는 캐시 쉬레너는 리필 제품을 파는 친환경 매장인 ‘마마 앤 하파스’를 찾아 식기세척기 세제 몇 개를 골라 계산대로 가져갔습니다. 직원이 그에게 보여준 태블릿 화면엔 ‘팁을 얼마를 남길 것이냐’고 묻는 메시지가 표시됐습니다. 결제 말고는 직원의 서비스를 받은 것도 없는데 굳이 팁을 줘야 하는 걸까요? 쉬레너는 순간 주저했지만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결국 팁을 남겼습니다. 미국 매체 복스(Vox)가 ‘모두가 지금 팁을 원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소개한 사례입니다. 과거엔 식당이나 술집 같은 업종에서나 주는 걸로 여겨졌던 팁을 이제 거의 모든 서비스 업종에서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심지어 이런 곳에서도 고객은 팁을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합니다. 자동 세차장, 보톡스 시술, 스무디 만드는 로봇 카페.
왜 그렇게 됐을까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태블릿 결제’ 시스템의 확산입니다. 과거엔 팁을 보통 현금으로 줬죠. 식사 뒤 테이블에 지폐 몇장을 남기거나, 결제할 때 ‘Tips’이라고 쓰인 유리병에 돈을 넣는 식이었습니다. 신용카드로 결제한다면 팁을 몇 달러로 할지를 볼펜으로 따로 써넣어야 했고요.
레스토랑에서 주로 쓰는 ‘토스트’사의 포스 단말기를 이용하는 고객이 팁을 얼마 줄지를 선택하고 있다. 왼쪽부터 팁 없음, 15%, 20%, 25%라고 적힌 버튼이 있다. 토스트 공식 블로그
결제 시스템에선 보통 고객의 선택을 쉽게 하기 위해 객관식으로 팁 비율을 제시하곤 하는데요. 레스토랑의 경우엔 그 최소비율이 일반적으로 18% 또는 20%부터 시작하고, 보통 최대 30%까지 제시합니다(업주가 비율을 설정). 만약 10%만 팁으로 주고 싶다면? 입력하는 창이 없거나, 있더라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고객은 그 버튼을 찾느라 몇십 초를 허비하는 대신 그냥 18%를 누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소비자행동을 연구하는 마이클 린 코넬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상인들은 더 많이 팁을 요구할수록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18%에서 시작하는 팁 옵션은 이전보다 더 높은 수익을 창출합니다.”
‘디지털 팁’ 도입으로 이전보다 팁을 주는 비율이 은근슬쩍 높아지고 있는 건데요. 일종의 넛지 효과(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라 하겠습니다.
테이크아웃이 주를 이루는 커피숍이나 샌드위치 가게들이 대표적입니다. 이전엔 이름을 서로 알고 있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이거나, 친절한 서비스를 받았을 때 정도에만 고객들이 ‘팁항아리’에 팁을 남겼을 텐데요. 이젠 무조건 팁 버튼을 눌러야 결제가 끝납니다. 물론 ‘팁 없음’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웃는 얼굴로 직원이 빤히 쳐다 보고 있으니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팁을 요구 받았는데 주지 않을 때(특히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점원이 알기 쉬울수록) 죄책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팁 유리병’ 시절엔 팁을 넣는 게 적극적인 행동이었지만 ‘디지털 팁’ 도입 이후엔 팁을 주지 않기를 선택하는 게 적극적인 행동이 됐다. 예전보다 팁을 주게 될 확률이 훨씬 높아졌다. 게티이미지
‘다크패턴(소비자를 유도하기 위해 업체가 의도한 웹 설계)’ 전문가인 해리 브리그널은 “터치스크린은 큰 팁을 주는 버튼을 강조하고, 전혀 팁을 주지 않는 버튼은 덜 강조한다”며 “어떤 소비자는 원해서가 아니라 너무 당황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버튼을 누르게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런 경험을 하면 소비자들은 억지로 팁 주기를 강요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겠죠. ‘팁플레이션(Tipflation)’이란 말과 함께 ‘팁 피로’라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입니다.
구에프대학의 식품경제학과의 마이크 본 마소우 교수는 “팁 피로로 고객들은 팁이 주는 상호작용에서 부정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며 “최악의 경우엔 팁 피로로 인해 고객이 팁을 적게 주거나 완전히 멈출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팁플레이션의 부작용이 분명하다는 건데요.
여기서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고객이 어쩔 수 없이 팁을 주게 만드는 ‘죄책감’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눈 앞에 있는 매장 점원이 그 이익을 온전히 취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경제학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이 시간당 2.13달러라고?
미국 풀서비스 레스토랑에선 음식값의 20%를 팁으로 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많은 레스토랑 서버들이 낮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팁은 필수다. 게티이미지
즉,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임금을 낮게 준 것이 팁이 일반화된 이유였는데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중앙정부가 정한 연방최저임금과 각 주가 정한 주별 최저임금 중 더 높은 것을 적용하게 돼있는데요. 현재 연방최저임금은 시간당 7.25달러(약 9600원)입니다. 그런데 팁을 받는 근로자의 연방최저임금(Tipped Minimum Wage)은 그보다 훨씬 낮은 시간당 2.13달러(약 2800원)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연방 최저임금은 팁을 받는 근로자와 받지 않는 근로자를 차별한다. 팁을 받받지 않는 일반 근로자는 시간당 7.25달러, 팁을 받는 근로자는 시간당 2.13달러가 연방 최저임금이다. 자료: 패트리어트 소프트웨어
한마디로 그동안에도 고용주가 줄 임금 중 상당 부분을 손님들의 팁으로 메워왔던 건데요. 최근 나타나는 ‘팁플레이션’ 현상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 미국 서비스업종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으로 각종 비용이 뛰는 상황에서 점주들은 임금을 올려줄 여력이 없죠. 그러자 대신 직원들이 팁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일부 호텔에선 고객들이 쉽게 팁을 남길 수 있게 QR코드까지 도입했다고 하죠.
보스톤대학 호텔경영학부의 션정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호텔)은 임금을 인상할 예산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팁을 디지털로 지불할 수 있는 접근성을 높이고 소비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팁플레이션은 고용주 입장에선 ‘손 안대고 코 푸는’ 좋은 방법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스타벅스입니다. 요즘 미국 스타벅스는 드라이브스루(차를 탄 채로 이용) 매장에서도 팁을 받는 거 아시나요? 지난해 9월 스타벅스가 일부 매장을 시작으로 ‘신용카드 팁 시스템’을 새로 도입했기 때문인데요. 신용카드 결제화면에서 ‘팁을 얼마 주겠냐’고 묻기 시작한 겁니다.
미국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새로 도입된 신용카드 팁 시스템이 고객에게 대놓고 팁을 요구하는 게 부끄럽다는 내용으로 올린 틱톡 영상의 화면. 영상 속 직원은 창문 아래로 숨어서 손님 대신 ‘팁 없음’ 버튼을 눌렀다. 틱톡 화면캡처
팁이 차별 조장 vs. 미국 전통
언뜻 보면 팁을 많이 받게 하는 건 고용주(임금을 적게 줄 수 있음)와 직원(실질 소득이 늘어남) 모두에 윈윈입니다. 잃는 건 손님뿐인 것 같죠.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불평등한 구조(서비스 업종에 대한 낮은 임금)를 공고히 하는 건 아닐까요. 미국에선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역사가 꽤 깊습니다. 2010년대부터 활동한 ‘하나의 공정한 임금(One Fair Wage)’ 운동이 대표적입니다. 팁을 받는 근로자에 대한 차별적인 최저임금을 없애고 누구에게나 똑 같은 최저임금을 보장하라며 입법 로비를 하고 있는데요.
이를 지지하는 연구도 적지 않습니다.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연구 결과에 따르면 팁을 받는 근로자는 여러 어려움에 처합니다. 팁을 받지 않는 근로자와 비교할 때 소득 변동성이 더 크고, (팁을 포함해도) 평균적으로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성별과 인종에 따라 팁에서도 차별을 받죠(여성과 비 백인의 팁이 더 낮은 편). 따라서 팁에 의존하지 않고도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최저임금을 인상하라는 결론입니다.
근로자들이 ‘하나의 공정한 임금’ 정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 OFW 공식 트위터
가장 큰 반대 이유는 역시 인건비 부담이 커진다는 겁니다. 소상공인 폐업이나 일자리 감소, 근로시간 감축으로 결국 이어질 거라고 보는 거죠. 팁 문화가 일종의 미국 전통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시각도 있는데요. 팁 받는 근로자에 최저임금을 낮게 유지해야 팁 문화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참으로 미국적인 논쟁이 아닐 수 없는데요. 물가상승으로 갈수록 소비자 지갑이 얇아지고 있는 요즘, 팁플레이션까지 더해지면서 이를 둘러싼 논쟁과 갈등은 더 커질 겁니다. By.딥다이브
최근 뉴욕에 사는 지인을 만났더니 “음식값의 20%나 되는 팁이 부담스러워서 가급적 투고(to-go)로 사먹는다”고 말하더군요. 게다가 이제 음식점이 아닌 곳까지 팁을 받는다니, 안 그래도 물가도 비싼데 소비자 부담이 더 커지게 됐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는데 과연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가 궁금합니다. 팁플레이션 관련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디지털 팁’이 도입되면서 과거보다 더 많은 매장에서 더 많은 비율의 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리적 압박감과 죄책감 때문에 실제 지불의사보다 더 많은 팁을 남기는 소비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팁플레이션’입니다.
-이는 팬데믹 이후 인력난에 시달리는 고용주들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임금을 올려줄 돈은 없지만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팁을 유도해서 근로자의 실질 소득을 늘리려는 거죠.
-미국에서 팁을 받는 근로자의 연방 최저임금은 고작 시간당 2.13달러입니다. 팁으로 낮은 임금을 보충하게 하는 건 팁 받는 근로자에 대한 차별일까요? 아니면 팁 문화라는 전통을 유지하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선택일까요.
*이 기사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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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