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밝은 갈색 머리, 파란 눈동자의 20대 대학생이 눈물을 왈칵 쏟았다. 이날 처음 만난 90대 한국인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때였다. 대학생은 미국인 이바 개벌러 씨(23·여), 할아버지는 6·25전쟁 참전 용사인 이근엽 전 연세대 교수(93)다.
이 전 교수는 “학생 얼굴을 보니 학생의 외할아버지 얼굴이 상상된다”며 “학생과 나는 친손녀와 할아버지 같다”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개벌러 씨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정말 좋다. 할아버지 집에 온 것 같다”며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지난달 31일 두 사람이 만났다. 한미동맹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두 사람이 서울 동작구의 이 전 교수 자택에서 자리를 함께한 것. 이 전 교수는 개벌러 씨가 온다는 소식에 약속 시간 30분 전부터 아파트 1층 현관까지 나와 기다렸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가슴엔 화랑무공훈장까지 달았다. 이 전 교수는 개벌러 씨를 처음 만나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건넸고, 개벌러 씨는 한국어로 화답했다.
개벌러 씨는 “외할아버지는 미 해군 무전병으로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등에서 활약했다”며 조심스럽게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꺼냈다. 그는 “당시 외할아버지가 어떤 섬에 있을 때 북한군이 눈 흰자위가 다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는데 무전병이라 무기가 없어 공구를 들고 싸울 준비를 하던 중에 다른 동료가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생전에 자주 하셨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던 이 전 교수는 “내가 1950년 12월에 입대했으니 외할아버지는 나와 동갑이지만 군대는 선배”라며 웃었다.
이바 개벌러 씨의 외할아버지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프랭크 개벌러 씨(1930~2020)의 생전 모습. 오른쪽 사진은 프랭스 개벌러 씨가 20대 미 해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사진이다.
‘사탕’도 대화의 매개체가 됐다. 이 전 교수는 “미군과 진지 교대를 하기 전 미군 벙커에 들어가 보면 사탕이 많았다”며 “이걸 동료들에게 가져다주면 그렇게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개벌러 씨는 “외할아버지가 생전 한국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면 정말 좋아했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고 했다.
이 전 교수는 “한국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 앞으로 맛있는 걸 자주 사주는 것으로 외할아버지에게 진 빚을 갚겠다”며 손을 꼭 잡으면서 웃었다. 이날 이 전 교수는 개벌러 씨를 위해 6·25전쟁 당시 한 미군이 건네준 미국 노래집에 들어있던 미국 가곡 ‘스와니강’을 영어로 불러주기도 했다. 이 전 교수는 “전장에서 총탄에 맞지 않으려고 그 노래집을 가슴에 품고 다니곤 했다”며 “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에 계신 엄마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다.
개벌러 씨는 말했다. “이 전 교수님처럼 6·25전쟁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분들이 미국에 가서 미국 학생들에게 얘기해줄 기회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미국 역사 수업에서 6·25전쟁에 대해 더 많이 가르쳤으면 하고요. 그래야 한미동맹이 더 견고해지지 않을까요?”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