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트 14-13. 한국도로공사 박정아가 회심의 공격을 날리자 흥국생명 리베로 김해란은 몸을 날렸다. ‘디그 여왕’으로 불리는 김해란의 손끝에 닿았지만 공은 끝내 떠오르지 못하고 코트 위에 떨어졌다. 도로공사 선수단과 코치진이 모두 코트 위로 뛰어나왔다. 경기 전 “기적을 기록에 남기느냐, 팬들의 기억에 잠시 남느냐는 5차전에 달렸다”던 김종민 도로공사 감독의 바람대로 도로공사의 기적은 V리그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 됐다.
불가능해 보일 것만 같던 0% 확률을 깼다. 도로공사가 프로배구 V리그 최초 챔피언결정전 ‘리버스 스윕’에 성공하며 구단 두 번째 챔프전 우승을 차지했다. 6일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여자부 챔프전 최종 5차전에서 3-2(23-25, 25-23, 25-23, 23-25, 15-13)로 역전승하며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정상에 섰다. 통합 우승을 차지했던 2017~2018시즌에 이어 두 번째로 챔프전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6연속 득점으로 뒤집은 3세트
하이라이트는 3세트였다. 19-23까지 뒤처졌던 도로공사는 이후 6연속 득점에 성공하며 세트를 뒤집었다. 김연경이 후위에 내려가 흥국생명의 화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옐레나, 김미연의 공격 범실이 연이어 나왔다. 도로공사 캣벨이 퀵오픈 공격에 성공하며 직접 세트를 마무리했다. 승리의 기운이 도로공사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흥국생명에 4세트를 내주긴 했지만 도로공사는 5세트에 다시 상대를 몰아붙였다. 흥국생명 김다은의 리시브를 흔든 박정아의 서브 성공으로 선취점을 안고 시작한 도로공사는 5세트 내내 동점을 허용하지 않은 채 세트를 끌고 나갔다.
김종민 감독의 절묘한 비디오 판독신청도 쐐기를 박았다. 도로공사가 13-12로 앞선 상황에서 심판 비디오 판독을 통해 박정아의 공격이 라인을 벗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김 감독이 다시 터치아웃에 대한 비디오 판독을 신청한 결과 상대 블로커 옐레나의 손가락에 공이 맞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13-13 동점이 될 위기가 14-12로 바뀌었다. 흥국생명 이주아의 블로킹으로 1점 차까지 쫓겼지만 박정아의 공격이 성공하면서 2시간 38분 혈투에 마침표를 찍었다.
도로공사 캣벨이 팀 내 최다인 32득점(공격 성공률 45.45%)을 기록했다. 특히 최종 5세트에 6득점에 공격 효율 100%를 기록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캣벨은 기자단 투표 31표 중 17표를 받아 챔프전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이날 양 팀은 블로킹(10점), 서브(3점) 득점이 같았지만 범실에서 도로공사 16개, 흥국생명 28개로 승부가 갈렸다.
●0%의 불가능을 깬 도로공사
도로공사의 이번 시즌 자체가 불가능과의 싸움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조기 종료된 지난 시즌 정규리그 2위를 했지만 올 시즌 ‘봄 배구’ 진출 후보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비시즌 동안 선수 5명이 코트를 떠났고 새 외국인 선수 카타리나의 활약 가능성에도 의문부호가 붙었다. 4라운드 들어 지난 시즌 흥국생명에서 뛰던 캣벨을 새로 영입했지만 시즌 막판 4연패에 빠지며 봄 배구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 4경기에서 1위 흥국생명, 2위 현대건설을 모두 꺾는 등 4연승을 달리며 3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탔다. 그러고는 현대건설과의 플레이오프에서 2전 전승을 거두며 2018~2019시즌(당시 준우승) 이후 4시즌 만에 챔프전 무대에 복귀했다. 그리고 당시 우승팀이던 흥국생명과 재회했다.
챔프전에서도 도로공사는 방문 경기인 1, 2차전을 모두 내주며 벼랑에 몰렸다. 역대 챔프전에서 1, 2차전 승리 팀의 우승 확률은 100%였던 만큼 도로공사에 더는 기회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1, 2차전 당시 일부 주전 선수들이 몸살감기 증상을 겪으면서 컨디션도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도로공사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3, 4차전 모두 1세트를 내주고 2~4세트를 따내는 저력을 발휘하며 시리즈 전적 2승 2패로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끝내 V리그 첫 리버스 스윕에 성공했다.
김종민 감독은 “기적을 일궈낸 선수들에게 고맙다. 선수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에 ‘살살 해라’ 이 말도 하고 싶었는데 선수들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워낙 경험 많은 선수들이다 보니 뒤에서 채찍질하고 끌고 갔던데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우승 소감을 밝혔다. 계속해 “시즌 전부터 (우승 후보로) 우리 팀엔 다들 관심도 없었다. 잃을 것도 없었던 만큼 상대가 더 부담을 가졌다. 선수들이 잘 버텨줬다”고 말했다.
●100% 확률 이루지 못한 흥국생명, 김연경은 거취 가능성 열어 둬
한 수 위 전력으로 평가받은 흥국생명은 안방에서 열린 1, 2차전을 모두 쓸어 담으며 우승 한 걸음 앞까지 다가섰지만 끝내 챔프전 반지를 끼지 못했다. 역대 챔프전 처음으로 1, 2차전을 따내고도 우승하지 못한 팀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다섯 번째 챔프전 우승 도전도 다음을 기약했다.
흥국생명 김연경은 이날도 30득점으로 분전했지만 김연경과 대각에 서는 김미연이 4득점에 그치는 등 다른 쪽에서 활로를 뚫지 못하면서 끝내 무릎을 꿇었다. 2020~2021시즌 준우승에 이어 다시 한번 고배를 마셨다. 마르첼로 아본단자 흥국생명 감독은 “(우리 팀 전력의) 90%는 김연경으로 돌아간다. 선수 혼자서는 절대 우승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며 아쉬워했다.
시즌 중반 은퇴 가능성을 거론했던 김연경은 경기 뒤 “쉬운 결정은 아닌 거 같다. 부모님도 가족도 그렇고 많은 분이 (선수 생활 연장을) 원하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생각해서 (거취를) 결정하려 한다”고 말했다. 올 시즌 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는 김연경은 “원래 소속 구단과도 어느 정도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날 경기장엔 6125명 만원 관중이 들어서며 2~4차전에 이어 챔프전 네 경기 연속 매진을 기록했다. 올 정규시즌에는 여자부에서 19차례 매진이 나왔는데 그중 17번이 흥국생명 경기였다.
강홍구기자 wind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