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앙드레 뱅상이 1784년경 그린 ‘압데라 사람들 사이에 있는 데모크리토스’. 데모크리토스(오른쪽)는 그리스 북부 압데라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 왕의 현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은 서양 과학의 전형적 특징들을 보여준다. 자연에 대한 물질 중심적 사고방식, 복잡한 물체를 단순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려는 분석적 태도, 인간의 마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물질의 운동들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확신 등이 그렇다. 19세기까지 서양에서 ‘원자론’이 ‘과학’의 동의어처럼 쓰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어느 시대의 과학 체계이건, 서양의 과학 이론은 거의 예외 없이 ‘원자론의 DNA’을 물려받았다.》
모든 물질의 최소 단위는 ‘원자’
정말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큼 단순 명쾌하다. 그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원리를 가정할 뿐이다. 하나는 원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허공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연물들을 계속 나누면 마침내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것’(a-tomon)에 이른다고 보고 물질의 최소 단위를 ‘원자’(atomon)라고 불렀다. 모든 자연물이 흙, 불, 물, 공기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사고의 혁명이었다.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원자들은 크기와 형태가 서로 다르고 수가 무한하다. 이것들이 무한히 넓은 공간에서 운동하다가 서로 부딪쳐 합치거나 흩어진다. 그 결과가 자연물의 생성과 소멸이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천체이건 예외가 없다. 어떤 경우든 생성은 원자들의 결합이고 소멸은 원자들의 해체이다. 하지만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원자들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영원한 원자들의 결합과 해체가 계속되는 한 우주도 영원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을 알파벳의 낱글자들에 비유한 적이 있다. A, B, D, G, O 등의 낱글자는 형태가 다르다. 이런 낱글자들이 합쳐서 일정한 배열을 이루어 서로 다른 낱말들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똑같은 D, G, O가 합쳐도 배열이 다르면 DOG이 될 수도, GOD이 될 수도 있다. ‘소주’와 ‘주소’가 그렇듯이. 이렇듯 낱글자들의 조합으로 생겨난 각각의 낱말이 다른 낱말과 합쳐져 문장을 만들고, 문장과 문장이 합쳐져 긴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원자론이 상상한 우주도 그렇게 짜인 거대한 텍스트와 같다. 복잡한 것이 단순한 것으로 나뉘고 마침내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것으로 환원된다는 점은 우주의 모습이나 텍스트의 모습에서나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텍스트는 쓰는 사람이 있지만 원자들로 이루어진 우주에는 그런 원리가 없다는 것뿐이다.
‘영혼의 원자’는 섬세하고 둥글다?
레옹 알렉상드르 들롬므가 1868년 조각한 ‘영혼의 자리에 대해 생각하는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대표자에게도 가장 큰 고민거리는 ‘영혼’, 즉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기발하다. 하지만 영혼이 비물질적 존재라고 믿었던 플라톤이나 후대 사람들에게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은 매우 황당하고 불경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들에게만 그랬을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20세기의 이론물리학자 슈뢰딩거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비판했다. 그의 반론은 간단하다. 우리는 저마다 정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몸을 움직인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원자론이 옳다면 그런 자유로운 운동은 가능하지 않다. 장차 일어나게 될 원자들의 운동은 그것들의 현재 배치와 운동 상태에 의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이든 그때 도달한 상태는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상태를 낳고 이것은 다시 그에 뒤따르는 상태를 낳고…. 이런 과정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원자들의 운동 속에서 우리 자신들이나 살아 있는 것들의 자유로운 행동이 어떻게 가능할까?
“영혼의 경계는 찾을 수 없다”
기원전 5세기에 원자론을 창시한 데모크리토스. 앙투안 코이펠, 1692년 작.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학문에서든 삶에서든 많이 아는 것은 분명 큰 미덕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앎의 한계를 아는 것은 더 큰 미덕이다. 큰 미덕이 더 큰 미덕을 가리면 길을 잃는다. 데모크리토스 같은 현자도 그렇게 길을 잃었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