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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전 부서질까 정성껏 발굴한 천마도, 지금까지도 뒤틀림-변색 없어 자부심”

입력 | 2023-04-07 03:00:00

1973년 천마총 발굴 원로 좌담회
“도면 작성-원형 보존 등 첫 시도
천마총은 한국 과학 발굴의 시초”



1973년 7월 3일 경북 경주시 천마총 발굴 현장의 발굴단 모습. 왼쪽부터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 고 박지명 문화재관리국 직원, 고 김정기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단장), 소성옥 당시 조사보조원,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천마도(天馬圖)가 나오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장니(障泥·말 안장의 부속구) 두 장이 겹쳐진 채로 출토됐는데, 아래 장을 들춰 보니 선명한 색이 일품이었어요.”

1973년 8월 22일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담당관실에 소속해 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80)은 경북 경주시 황남동 155호분 발굴조사 현장에서 국보 ‘천마총(天馬塚) 장니 천마도’가 발굴되던 당시를 어제 일처럼 회고했다.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6일 경북 경주시 힐튼호텔에서 주최한 특별좌담회 ‘천마총, 그날의 이야기’에 발굴에 참여했던 지 전 관장과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75),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76),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71), 소성옥 씨(71)가 50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발굴 당시 나무껍질로 만든 유물이 부서질까 봐 지 전 관장을 포함한 발굴조사원 6명이 달라붙어 커다란 한지를 대고 상자 위에 옮겼다고 한다. 상자 안에는 솜과 소독된 한지를 겹겹으로 깔았고,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을 적신 탈지면을 둘렀다. 지 전 관장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천마도는 뒤틀림이나 변색이 없다”며 “우리가 정성으로 최선을 다한 덕인 것 같아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천마총 발굴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국가가 주도한 첫 번째 기획 발굴이다. 1973년 4월 6일 첫 발굴을 시작해 국보 ‘천마총 금관’ 등을 포함한 유물 1만1526점이 쏟아져 나왔다. 고분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가 출토되면서 ‘천마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천마총 발굴은 발굴일지를 세분화해 기록한 ‘한국 과학 발굴의 시초’로 여겨진다. 당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담당관실 소속으로 발굴 조사에 참여한 고 박지명 씨가 발굴 현장을 실측해 도면을 남겼다. 남 원장은 수년 전 작고한 박 씨를 떠올리며 “우리나라 발굴 현장에서 도면을 온전하게 작성한 건 천마총이 처음”이라며 “우리가 이런 기록을 남긴 데엔 박 씨의 공이 컸다”고 했다.

유물 보관 상자에 점토를 깔고, 출토되기 전 모습 그대로 핀셋으로 옮긴 것도 천마총 발굴 현장에서 처음 시도했다. 천마총 발굴조사단 부단장이었던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이날 영상을 통해 “5∼6시간이 걸리더라도 핀셋으로 하나씩, 발견된 모습 그대로 유물 상자에 옮겨 담았다”고 회고했다. 이날 좌담회 사회를 맡은 최 교수는 “우리가 늙는 동안 천마총 발굴은 한국 현대사의 일부가 됐고, 고고학과 보존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경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