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정지돈 지음/228쪽·1만4000원·작가정신
표제작 속 ‘나’와 연인인 ‘엠’은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다. 나는 산책자에 대한 소설 겸 에세이를 구상하려고 파리에 왔다. 나는 마블 영화를 싫어하는 엠을 설득하기 위해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 담긴 주제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나의 설명에 따르면 캡틴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행위는 역동적인 의지적 행위인 달리기다. 반면 그의 적인 시베리아산 사이보그 윈터 솔져는 절대 뛰지 않는다. 윈터 솔져의 걷기는 자유의지를 상실한 꼭두각시를 상징하는 것이다.
독창적인 형식과 언어로 주목을 받아온 작가가 처음 펴낸 연작소설집 속 작품들은 걷기와 달리기, 즉 모빌리티(움직임)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담았다. 네 편의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와 엠은 걷기와 달리기 형태의 속성과 그것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영화, 책 등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인용하며 독자를 ‘모빌리티’에 대한 사유의 장으로 이끈다.
책을 읽다 보면 걷기와 달리기의 속성이 우리 사회와 문화 속에 어떻게 발현돼 있는지 깨닫게 된다. 달리기는 목적 지향적이고, 외부의 것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반면 걷기는 계속해서 시간을 늘리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세상의 틈새를 마주하게 한다. 작가는 영국 작가 이언 싱클레어의 표현을 인용하며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급진적 행위”라고 말한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