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충만 충남 당진여행 두견주에 깃든 ‘영랑’의 효심… 목신제 지내는 천년 은행나무 복고풍 인생샷 명소 면천읍성 … 박지원, 주역 괘로 연못 조성 20만 唐군 물리친 기벌포 해전…살라미스 해전보다 드라마틱해
최근 복원되고 있는 조선시대 성곽인 면천읍성. 둥그스름한 읍성 안 중심부에 복원된 객사 건물, 은행나무, 안샘 등이 자리잡고 있다.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옛날 건물들은 카페와 미술관, 책방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챗GPT와 인공지능 등이 사람 일을 빠르게 대체해가는 세상에서도 복고풍 레트로 감성과 설화 같은 스토리를 그리워하는 이도 늘고 있다. 너무 빨리 변화하는 사회에서 한숨 돌리거나 쉬어가고 싶은 마음일 게다. 충남 당진시 면천면은 충남 내포문화권의 중심지이면서도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감성 충만’ 여행지다. ‘심청전’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효녀 스토리를 담고 있는 면천읍성, 삼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적 장치’들이 펼쳐진다.》
●‘영랑 설화’의 무대 면천읍성
고려 건국공신인 아버지가 병이 들어 고향으로 낙향했다. 휴양을 하는데도 병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효심이 깊은 딸은 인근 아미산에 올라 지극정성으로 백일 기도를 드렸다. 기도 마지막 날, 딸의 효성에 감응해 신선이 나타났다. “아미산에 핀 진달래꽃(두견화)과 찹쌀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의 물을 사용하고 100일 후에 아버지께 마시게 하라. 뜰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어 정성을 들여라.” 신선은 자세히 계시했다. 딸이 시킨 대로 했더니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우리나라 효녀 설화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주는 스토리다.
그런데 이 설화는 매우 구체적이다. 설화가 탄생한 시대는 900년대 전반인 고려 초기, 무대는 충남 당진시 면천읍성 내 마을이다. 무대의 주인공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복지겸 장군의 딸이다. ‘영랑’이라고 불리는 효녀가 아버지를 위해 100일 기도를 했던 아미산(해발 349m)도 바로 면천면에 있다. 지금 진달래꽃과 철쭉이 활짝 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아름다운 산이다.
면천은 읍성이 관광문화 상품으로 주목받기 전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인근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과는 불과 7.5km 떨어진 거리임에도 스치듯 지나가던 길목 정도로 취급됐다.
●천년 은행나무의 무병장수 기운
읍성 내 성안마을을 조망해보기 위해 원기루 누각에 올랐다. 주위로 반원형의 성곽이 펼쳐지는 가운데, 마을 중심 쪽으로는 최근 복원된 객사 건물(조종관)과 함께 유난히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효녀 설화가 사실임을 ‘증거하는’ 나무다. 면천 명물로 꼽히는 이 은행나무는 대일항쟁기 백로가 날아와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면천 은행나무는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두 나무 모두 20m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고, 성인 남성 6명이 양팔을 뻗어야 나무 둘레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굵다. 110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몇 차례 벼락을 맞아 줄기 안쪽이 찢겨 나가기도 했지만, 지금도 튼실한 은행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고 한다.
매년 음력 2월 초하루에 은행나무에서 거행되는 목신제.
두견주를 빚을 때 사용한 샘물인 ‘안샘’.
한편 복지겸의 딸이 아버지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담근 두견주는 중요문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는데,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의 만찬주로 선정되면서 유명해졌다. 면천두견주전수교육관에서는 직접 두견주 빚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읍성 내 아담한 성안 마을은 옛 건물들이 감성을 한껏 돋워준다고 해서 ‘면천레트로거리’로도 불린다. 옛 우체국 건물과 양곡창고 등을 개조한 카페와 미술관이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운 만남을 강조하듯 서 있다. 건물 내·외관을 옛 모습 그대로 남겨둔 게 인상적이다.
실학자 박지원이 조성한 연못 ‘골정지’와 정자인 ‘건곤일초정’.
●20만 당나라군 무찌른 기벌포 해전
골정저수지에서 빠져나와 바다 쪽으로 이동했다. 몽산 등 면천면 일대 산에서 흘러내린 내들은 남원천으로 모여든 뒤 서해로 빠져나간다. 가로수가 온통 왕매실나무로 치장된 남원천 둑방길인 왕매실길(당진시 순성면)을 지나면 서해 아산만으로 이어진다. 기벌포 해전의 무대에서 상념에 젖어든 역사학자 복기대 교수.
기벌포 해전은 676년에 벌어진 마지막 나당(羅唐)전쟁이다. 당시 20만 해군을 데리고 온 당나라 장수 설인귀와 신라 해군을 지휘한 6두품 출신 시득은 20여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신라는 당나라에 비해 엄청난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군 4000명의 목을 베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해전은 기원전 480년 거대 해군력을 동원한 페르시아와 열세였던 그리스 함대가 지중해에서 맞붙은 살라미스 해전에 비유될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복 교수는 “기벌포 전쟁에서 신라에 원한이 맺힌 고구려나 백제인들이 당나라를 도와 신라군을 무찌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신라가 이길 수 있었다”고 해석했다. 이 전쟁으로 신라는 당나라와 단교를 하고, 마침내 3국 통일을 이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벌포는 대체로 충남 서천의 금강하구로 추정돼 왔다. 당나라군이 백제의 수도 부여와 가까운 금강 하구에 상륙해 공격했을 것이므로 그곳을 기벌포라고 추정한 것이다. 그런데 20만 당나라군을 태운 대규모 함선들이 한꺼번에 상류에 정박하기에는 금강 하구가 너무나 좁을뿐더러 안전상의 문제가 커서 적절치 않다. 그 대신 당나라 관료 가탐이 지은 지리지인 ‘도리기’에서는 기벌포가 당진항임을 암시한다. 가탐은 산둥반도 등주(펑라이의 옛 이름)에서 출발해 해안을 끼고 돌아 한반도 장구진(長口鎭)에서 내리면 신라 왕성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장구진, 즉 아가리가 긴 폭이 넓은 항구가 한반도 상륙 지점으로 지금의 당진항을 가리킨다. 신라가 후에 당나라와 국교를 재개할 때도 아산만의 당진항을 이용했고,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군도 이 루트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한국과 중국 간 중요 해상 교통로였던 것이다.
기벌포 해전의 현장 중 하나인 왜목항에서 수토 여정을 마쳤다. 서해에서 동해처럼 일출을 볼 수 있는 명소로 알고 있던 왜목항이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왜목항의 상징인 왜가리 조형물 저 너머로 경기 화성시 궁평항이 보이는데, 그 사이 바다로 수많은 국제선들이 들락거리는 장면을 3차원(3D) 입체영상을 보듯 상상해 보았다.
글·사진 당진=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