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의 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하는데, 매우 걱정스럽다. 현재 군사들 중에는 지금 주둔한 곳에서 뽑아 보낼 군사가 따로 없으니, 다만 전진할 것을 권하는 하나의 방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경은 관병과 의병을 규합해 방어하도록 조치하라.”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1593년 3월 15일, 선조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都體察使·조선시대 의정·議政이 맡은 전시 최고 군직)였던 서애 류성룡(1542~1607)에게 내린 유지(有旨·임금의 분부를 전하는 문서)에 적힌 내용이다. 불과 한 달 전, 전라도 관찰사였던 권율(1537~1599)이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쳤지만 주변에서 그를 돕겠다고 나선 장수들은 없었다. 아군은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는데, 왜적의 세력은 더 불어나던 풍전등화 같은 상황. 선조는 도체찰사 류성룡에게 “의병을 규합하라”는 명을 내렸다.
‘유성룡 종가 문적-유지’ 2책의 표지. 문화재청 제공
1593년 3월 12일 선조가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에는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뜻밖의 칼날에 맞아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떠돌며 굶주림에 허덕이다 구렁텅이에서 나란히 죽어간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매우 슬프다”고 쓰여 있다. 문화재청 제공
1593년 4월 18일 선조가 도체찰사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에는 부산 일대 출몰하는 왜선에 대한 조정의 대응 전략이 상세히 담겼다. 이는 그간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 ‘징비록’과 중앙 관찰 사료 ‘조선왕조실록’ 등에선 확인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문화재청 제공
하루 전인 1593년 4월 17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왜적이 금년 봄에 병력을 증파하는 일에 대해 누구인들 염려하지 않겠는가. 비변사(備邊司·조선시대 군사회의기구)에 일러 조처를 강구하게 하라”고만 기록돼 있다. 이후 어떤 대책이 마련됐는지는 류성룡이 1592~1598년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 ‘징비록(懲毖錄)’과 그가 남긴 문집 ‘서애집’에도 설명되지 않았다. 공 책임연구원은 “그동안 급증하는 왜선에 대해 조정이 정확히 어떤 대응책을 내놨는지 알 수 없었던 역사의 공백을 이 사료가 채워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애 류성룡 영정. 사진 출처 전통문화포털
‘선조실록’을 포함한 중앙 관찬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선조의 감정도 유지 속에 드러난다. 1593년 3월 25일 선조가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에는 “명나라 장수가 왜적과 강화를 이미 결정했다고 하니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선조실록에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이 왜장과 강화를 맺어 4월 8일까지 군사를 물리겠다고 했다’고만 적혀 있다.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 속에는 명나라군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던 전략이 실패하자 선조가 울분을 토로하는 대목이 생생하게 담긴 것이다.
정제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문화재 전문위원은 “이번 사업으로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어 전문가들도 접근하기 어려웠던 유지와 일지 등 중요기록문화재 30종이 국역됐다”며 “당대 사회상을 가장 진솔하게 담고 있는 기록물에 대한 후속 연구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기록유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사료 원문과 국역본을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개할 예정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