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역사인식의 간극’ 저자 아사히 前 역사전문기자 와타나베
“‘불령선인’이나 ‘빨치산’을 추격하고 대치한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 간토(關東)대지진 시기에는 재향군인으로서 동일본의 넓은 지역에 1만 명이라는 규모로 존재한 셈이다. 앞서 (항일) 의병 진압에 동원된 병사도 있었다.”
100년 전인 1923년 일본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이 벌어진 핵심 배경으로 학살을 주도한 자경단의 중심인 재향군인을 지목한 책이 발간됐다.
그는 동학농민전쟁과 간토대지진 등 한일 사이에 벌어진 여러 사건의 맥락을 연속적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근대 일본이 조선 민중과 처음 대면한 동학농민전쟁 당시 취한 조치는 ‘모조리 살육’이었다. 1894년 11월 9일 일본군 부대에 전달된 명령은 “동학당의 ‘초절(剿绝·완전히 제거함)’”이었다. 항일의병 탄압 역시 철저한 초토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1920년에는 이른바 ‘간도 출병’을 통해 만주의 한국인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만행을 저질렀던 재향군인들이 조선인 학살에 앞장섰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1920년 신생 소비에트공화국 빨치산이 니콜라옙스크에서 일본군을 학살한 일명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일본 사회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그는 “간도 출병과 간토대지진은 공통적으로 적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불령선인’이란 누구인지, ‘빨치산’이란 어떤 집단인지 일본인은 구체적인 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지진으로 경찰이 기능을 잃은 상황에서 조직된 자경단은 실체도 없는 두려움과 증오가 되살아나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봤다.
그는 “일본 사회가 상실한 기억을 되살리는 게 나의 사명”이라며 “역사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여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