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박재석 퍼퓸 디렉터가 운영 중인 브랜드 ‘톰빌리’의 향수 뉴욕 컬렉션 중 하나인 ‘화이트 스팀 플라워’. 일반적인 대용량 향수와 다르게 재사용이 가능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으며, 패키지도 LP에서 영감을 받아 세로가 아닌 가로 형태다_출처 : 톰빌리
‘톰’이라는 가명을 쓰는 박재석 씨는 퍼퓸 디렉터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진 ‘향덕(향수 덕후)’이다. 보유한 향수만 400개가 넘고 향수 구입에만 3000만 원 이상을 쓴 그는 원하는 향을 갖기 위해서 1만 km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갈 정도로 향수에 진심이다. 그가 운영하는 향수 유튜브 채널 ‘톰빌리’는 구독자 수가 5만 가까이 된다. 그가 국내에 들여온 유럽의 니치 퍼퓸 브랜드 ‘프렌체스카 비앙키(Francesca Bianchi)’는 3개월 만에 2억 원어치나 팔려나가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단순히 향수를 즐기는 것을 넘어 직접 자신만의 브랜드를 론칭하기도 했다. 성공한 향덕에게 향수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들을 물었다.
박재석 디렉터가 운영하는 향수 전문 유튜브 채널 ‘톰빌리’. 톰빌리는 박 디렉터가 론칭한 브랜드의 이름이기도 하다_출처 : 톰빌리
● 향수를 손목에 뿌린다고?
박 씨는 스스로를 퍼퓸 디렉터라고 부른다. 단순히 향수를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향수의 기획과 생산 그리고 판매와 마케팅 등 모든 일을 총괄하기 때문이다. 향을 만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조향사보다 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박재석 디텍터가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계기는 유튜브 덕분이다. ‘톰빌리’라는 유튜브 채널 개설 당시만 해도 국내에 향수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채널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자신의 ‘덕력’을 바탕으로 올리는 콘텐츠들이 향수에 관심은 많지만 향수를 어려워하는 일반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는 가짜 향수를 구별하거나 향수를 제대로 뿌리는 법 등과 같은 콘텐츠를 올리며 구독자를 모았다.
톰빌리 채널에서 가장 조회수가 높은 영상, ‘조향사가 손목에 향수를 뿌리지 않는 이유’에서 소개하는 지속력과 확산력을 높이는 향수 사용법_출처 : 톰빌리
그 중 가장 큰 인기를 얻은 것은 바로 ‘조향사가 손목에 향수를 뿌리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의 영상이다. 이 영상의 조회수는 270만을 넘었다. 박재석 디렉터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깨부수는 콘텐츠라 조회수가 잘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박 디렉터는 “향수를 손목에 뿌리는 것은 향수의 본래 향을 망치는 행위”라고 조언했다. 흔히 손목 다음으로 향하는 귀 뒤도 사실은 적절한 부위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향수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본래 향을 지키는 것인데, 손목은 항상 어딘가 닿고 있는 부위이면서 수소이온농도(percentage of hydrogen, pH) 변화가 심해 향이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귀 뒤편 역시 유분을 만드는 땀샘이 있어서 향이 변질될 수 있어 적절한 곳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뿌려야 좋을까? 박 디렉터는 팔뚝 바깥쪽을 추천했다. 땀도 잘 안 나고 pH 농도가 일정한 편이라, 특히 여름에 향수를 뿌릴 때는 팔뚝 바깥쪽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 또한 긴 소매 옷을 입을 땐 손등에 뿌리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옷에 향수를 뿌려야 할 때는 옷의 소재를 미리 파악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향수의 주성분인 에탄올이 단백질을 분해할 수도 있어 옷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 그는 “겨울철 두꺼운 옷을 입어 뿌릴 곳이 마땅치 않으면 머리빗에 향수를 뿌리고 그 빗으로 머리를 빗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도 말했다.
부향률은 향수에서 알코올을 제외하고 향료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이에 따라 향수의 농도가 달라지는데 위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_출처 : 인터비즈
사람들이 향수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뿌리는 이유는 향을 더 오래 붙잡고 싶어서다. 하지만 이럴 경우 주변에 불쾌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 부향률이 높은 향수일수록 더 그렇다. 대안은 없을까? 박재석 디렉터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향수와 같은 향을 공유하는 보디 워시와 로션을 함께 쓸 것을 권했다. 그는 “다른 로션을 사용해도 지속 시간을 늘릴 수는 있지만 향의 선명도는 떨어진다”는 주의사항도 잊지 않았다.
너무 많아 한 곳에 모아 보관하기 힘들다는 박재석 디텍터의 향수 컬렉션 중 일부_ 출처 : 톰빌리
이와 함께 보관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향수에 치명적인 세 가지는 빛과 온도 그리고 산소다. 그는 “보관 장소는 서랍처럼 직사광선을 피하고 온도가 일정한 곳이 좋다”며 “화장실은 온도 변화가 큰 편이라 적절한 곳은 아니며, 아주 덥거나 추운 곳도 피해야 하고 사용 후엔 뚜껑을 닫는 것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 뉴진스 향? 에스파 향? 이거면 돼!
톰 빌리 채널은 최근 다시 한번 유명세를 탔다. ‘걸그룹 ‘뉴진스’에게서 느껴지는 향기?‘라는 제목의 영상을 통해 뉴진스에게 어울리는 향수와 그 특성을 설명한 콘텐츠가 화제를 모았기 때문. 박 디렉터는 이 영상에서 뉴진스를 만든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뉴진스 멤버들에게 선물한 향수들이 뉴진스의 개성과 매력에 딱 부합하는 향수들이라며 이들 향수들의 특징을 뉴진스의 음악과 비교해 설명한다. 그는 “민 대표가 멤버들에게 아스티에 드 빌라트(Astier de Villate)의 오 드 코롱(Eau de Cologne)이라는 향수를 선물했는데 이 향수는 자연스러운 느낌의 깨끗한 향수로 뉴진스의 시각적 그리고 청각적 특징에서 비롯되는 청량한 매력을 더욱 부각시키기에 제격인 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오 드 코롱은 향수 장르 중에서 상대적으로 향료 구성이 단출한 편에 속해서 범용성이 넓은데, 뉴진스의 음악도 악기 구성을 많이 가져가지 않는 편이라 듣기 편하다”며 “산타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의 아쿠아 델라 레지나(Acqua della Regina)나 아쿠아 디 파르마(Acqua Di Parma)의 콜로니아(Colonia)도 비슷한 느낌을 내기에 좋다”고 덧붙였다.
박재석 디렉터는 고스트 인 더 쉘을 차갑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이에게 선물하면 좋은 향수로 꼽기도 했다_출처 : 에따 리브르 도랑주
“에스파는 외모와 상반되는 강렬한 비트와 미래지향적인 콘셉트가 두드러진다. 일본 만화 공각기동대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향수는 기계 속 숨겨진 따뜻함을 가진 향수다. 유자의 시큼함이 처음엔 차갑게 느껴지는데 이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느낌이 특징”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 덕후의 시선에서 바라 본 브랜드
그렇다면 400개가 넘는 향수를 보유한 향덕의 컬렉션 중 가장 비싼 향수는 무엇일까. 바로 ‘헨리 자끄(Henry Jacques)의 앰브로즈(Ambrose)’다. 30ml짜리 한 병에 가격이 1백만 원이 넘는다. 생긴 것도 특이하다. 보통 향수와 다르게 스프레이 방식이 아니라 찍어서 발라야 한다. 이유는 진한 농도 때문. 그는 “알코올 함량을 최소로 해서 향료의 비율이 30%가 넘는데 이처럼 점도가 높으면 스프레이로는 분사가 어렵다. 대신 소량만 사용해도 향이 넓게 퍼지고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그럼 반대로 가성비 좋은 향수도 있을까? 그는 프랑스 브랜드 제품 중 100ml 향수를 5만 원대에 살 수 있는 로저 앤 갈렛(Roger and Gallet)을 꼽았다.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향수 회사는 오랜 시간 쌓아온 조향의 기술과 노하우를 자랑한다. 특히 이 향수는 조 말론 런던(Joe Malone London)의 시트러스 향의 대용품으로도 손색없다고.
프레데릭 말 뉴욕 부티크 실내_출처 : 톰빌리
그런가하면 박재석 디렉터는 마케팅을 가장 잘하는 브랜드로 프레데릭 말(Frederic Malle)을 꼽았다.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조향사는 많지만 향을 경험하는 방식까지 설계하는 이는 드물다. 프레데릭 말 부티크는 진공 시향관이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진공이 아닌 일반 공간에서의 시향은 주변의 여러 냄새와 섞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향수 본연의 향을 맡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이 외에도 바이레도(Byredo)와 르라보(Le Labo)를 눈여겨보는 브랜드로 꼽았다. 박재석 디렉터의 표현의 빌리자면, 바이레도는 “브랜드의 특성이 제품에도 깊게 배어 있어 향이 매우 명확하다”는 장점이 있다. 르라보는 “향수의 미래를 장인 정신에서 찾는 정체성”이 매력적이라고. 특히 그는 바이레도의 모하비 고스트(Mojave Ghost)랑 르라보의 상탈 33(Santal 33)을 가장 좋아하는 향수로 제시했다.
모하비 고스트는 사막에서 영감을 받은 제품이지만 플로럴 향이 메인이다. 부드럽고 은은하면서도 우아한 향기가 이름과 상반돼서 더 매혹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상탈 33은 그가 10년 전 뉴욕 거리에서 느꼈던 냄새 그 자체라며, “추억을 소환하는 향이라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 한국의 조 말론을 꿈꾸다
박재석 디렉터의 롤 모델은 세계적인 조향사 조 말론이다.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두 사람 모두 화학 전공자가 아니다. 또 중학교를 자퇴한 조 말론처럼 톰도 대학교를 스스로 그만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조향 전문학교에서 공부하거나 향수 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없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향수와 관련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기 위해선 화학 공부가 필수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향수에 대한 열정으로 향수를 만들고 있다.2019년 서울에을 방문한 조 말론에게 직접 만든 향수를 전했던 박재석 디렉터. 그는 조 말론이 그랬듯 세상에 없던 새로운 향수를 만들어 다양한 향적 문화 조성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_출처 : 톰빌리
특별히 그가 조 말론에게 꽃힌 이유가 있을까? 강한 향과 자극적인 광고가 주를 이루던 1990년 대, 단순한 구성에 자연스러운 향의 향수를 선보이며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조향사 조 말론처럼 다양한 향적 문화 조성에 기여하는 것이 박재석 디렉터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019년 서울에 방문한 조 말론을 만나 “언젠간 당신과 협업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그저 향수가 좋다는 이유로 무작정 업계에 뛰어들어 달려온 지 7년. 현실이 생각보다 향기롭진 않았지만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 2021년 여름, 국내에서 전혀 인지도가 없던 유럽의 니치 향수 브랜드 ‘프란체스카 비앙키(Francesca Bianchi)’를 국내에 론칭해 3개월 동안 온라인 판매로만 2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기도 하고 2022년 겨울에 자신만의 니치 향수 브랜드 ‘톰빌리’와 ‘구트구일’을 선보이며 덕후에서 창작자로 한 걸음 나아갔다. 박재석 디렉터는 “향수는 특정 교육 기관에서 공부한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나만의 향을 세상에 불어넣어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겠다는 목표를 위해 앞으로도 향수 덕질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순민 인터비즈 기자 royalblu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