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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처럼 사랑받은 일본인이 또 있었을까[광화문에서/황규인]

입력 | 2023-04-14 21:30:00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야구는 오타니, 축구는 손흥민.”

일본 매체 ‘사커 다이제스트’는 손흥민(31·토트넘)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통산 100호 골 소식을 전하면서 기사 제목에 이런 표현을 썼다. 손흥민은 100호 골을 넣은 뒤 “모든 아시아 선수가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이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정상을 차지한 뒤 “이번 우승은 아시아의 우승”이라고 발언한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게 이 매체 분석이었다.

사실 이 분석을 처음 내놓은 건 한국 매체였다. 한국 언론에서 오타니에 대해 긍정적인 기사를 쏟아내자 일본 매체에서도 이를 열심히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 스포츠 문화를 비교·연구하고 있는 요시자키 에이지 작가(49)는 “한국 언론에서 일본 스포츠 스타에 대해 이 정도 극찬을 이어가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진단했다.

한국 언론에서 오타니를 긍정적으로 다룬 기사를 이렇게 많이 쓰게 된 건 물론 독자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2021년 오타니 기사를 썼다가 “일본 선수 기사를 왜 쓰냐”고 항의하는 독자 e메일을 받은 경험이 있다. 오타니는 당시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유력한 최우수선수(MVP) 후보였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포털 사이트 기사 제목에 “완벽한 남자 오타니”라는 표현이 들어가도 ‘화나요’를 누른 독자 한 명 없다.

오타니는 일본 야구 선수뿐 아니라 일본 야구 대표팀에 대한 인식도 바꿔 놓았다. 포털 사이트 ‘다음’은 자사 중계를 통해 WBC 결승전을 시청한 팬들에게 ‘미국과 일본 중 어느 팀을 응원하는지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총 125만2885표 가운데 101만9504표(81.4%)가 일본 쪽으로 향했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은 “수백만 혹은 수천만에 이르는 ‘상상의 공동체’(국가)는 실재하는 11명의 (축구 대표)팀에 의해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진다”고 썼다. 물론 야구 대표팀도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은 자국 야구 대표팀을 ‘사무라이 저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타니는 한국인 가운데 80%가, 광복 이후 최고 우방인 미국이 아니라, 사무라이 저팬의 승리를 바라도록 만들었다.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언젠가 한국 야구에 다시 ‘황금 세대’가 등장한다면 그 세대는 이번 한일전에서 한국을 물리치는 데 앞장선 일본 대표 오타니를 보고 꿈을 키운 ‘오타니 세대’일 확률이 높다. 물론 일본 어느 축구장에서도 ‘제2의 손흥민’을 꿈꾸는 일본 축구 소년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이다.

스포츠가 이렇게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을 더욱 가까운 나라로 만드는 동안 두 나라를 더욱 멀고 먼 나라로 못 만들어 안달인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은 스스로 ‘운동선수보다 우리가 훨씬 큰일을 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