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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따라한 앵글일까? 몰래카메라였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입력 | 2023-04-15 15:34:00

[백년 사진 No.14]




▶지난 주였던 4월 7일 토요일에 올렸던 포스팅 “첫 눈, 첫사랑, 첫 꽃, 첫 낙엽… 멋있어도 먼저 나와야 찍혀서 보도된다. [백년사진 No. 13]”에 달린 댓글 중에서 흥미로운 분석이 있어서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kore**** 아이디로 접속하신 분이 남기셨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진을 찍히면/영혼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해서 사진 찍히는걸 결사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초상권 정도가 아니라 영혼권 이었던 것이죠/요즘 초상귄세태에 대해서는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그런지 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얼마전만해도 신문이나 잡지에 본인사진이 실리면 주변에 은근히 자랑하는 분위기였는데/얼굴로 돈벌어먹고 사는 직업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까지 민감하게 반응해서 삭막한세상 만드는데 일조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네요/살다보니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분간이 어렵네요/스마트해질수록 피곤해지는 세상입니다

▶요즘 제가 제일 관심이 많고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 해결하고 싶은 숙제처럼 생각하는 게 사실 초상권입니다. 검찰에 출두하는 피의자에 대한 인권보호차원에서 시작된 논의가 어느새 일반 시민 및 거리의 대중들에까지 확대되다보니 많은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됩니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서 이제 시민들의 얼굴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얼굴만이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어가고 있는 거지요. 우리는 모르지만 한국의 신문 사진과 방송화면은 이제 전 세계에서 ‘갈라파고스 섬’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신 사진기자를 비롯해 외국 사진기자들은 특별한 경우에만 모자이크를 할 수 있으며, 모자이크를 해야 하는 사유를 데스크들에게 보고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모자이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유를 데스크들에게 보고하고 세상에 사진을 보여줍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모자이크 사진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그 사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어 기록과 인권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황금비율을 만들고 싶습니다.

▶1923년 4월 9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봄 비 개인 후 - 장춘단 공원의 빨래터]



▶사진설명이 따로 없이 한 줄짜리 제목과 부제목만이 사진에 붙어 있습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빨래터가 있었나 봅니다. 봄비에 미뤄놨던 빨래감을 들고 나와 함께 빨래를 하는 모습을 찍을 사진입니다.

도시 풍경이라고 할 만한 내용입니다. 서울 장충동에 살지 않던 100년 전 시민들이나 시간이 지난 오늘날 독자들이 보면 재미있는 풍경입니다. 그러니 많지도 않은 신문 지면에 크게 자리 잡고 뉴스 대접을 받았겠지요.

▶이 사진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어쩌면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주인공이 없는, 아니면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주인공인 사진이 한국에는 꽤 많습니다. 단체사진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 사람이 줄을 맞춰 서 있는 사진에서, 맨 앞줄 맨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 옆과 그 뒤, 그리고 화면의 맨 끝에 위치한 사람도 같은 크기와 같은 포즈로 서 있습니다.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아무도 아주 드러나지 않는 평등한 사진입니다. 저는 ‘봄비 개인 후의 장충단공원 빨래터’ 사진에서도 한국인들의 이런 정서가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빨래터에 모인 7~8명의 아낙네 중에는 가장 포토제닉하거나 표정이 살아 있는 인물이 있었을 겁니다. 그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나머지 인물들을 부수적인 배경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촬영법도 있습니다. 굳이 예를 들어, 미국 신문이라면 아마 그렇게 촬영했을 겁니다.

사진의 아래쪽 세부 


▶한국의 사진이 서양의 사진과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앵글에서 보면 이런 측면 있습니다. 강약중강약이 덜 한, 평평한 원근법. 설명적이고 맥락이 잘 드러나는 구성 말입니다. 저는 이런 한국과 서양의 앵글 차이가 회화에서 존재하는 차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신문 사진도 한국 회화의 영향을 받아왔고,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하도록 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문화란 아이디어, 가치, 신념, 관습의 체계를 일컫습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의존하게 됩니다. 리처드 니스벳(Richard E. Nisbett)은 그의 저서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동양인들은 고대의 동양인들처럼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전체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데 익숙하며” 반대로 “현대의 서양인들은 고대의 그리스인들처럼 세상을 보다 분석적이고 원자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물을 주변 환경과 떨어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굳이 주인공을 부각시킬 필요도 없고, 맥락을 잘 보여줘야 하다보니 선택한 앵글이 ‘부감(俯瞰)’입니다.

사람도 잘 보이고, 그 사람들이 처해 있는 환경도 한 장의 사진에 잘 보이도록 카메라가 피사체 위에 위치하는 앵글이죠. 이런 앵글은 한국의 그림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도, 박수근의 유명한 작품 ‘빨래터’에서도 저는 이 사진과 같은 앵글을 보았습니다. 카메라맨이나 화가가 이미지 속 인물과 같은 눈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또는 언덕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앵글 말입니다.

사진의 위쪽 세부 


▶ 궁금한 점은, 사진 속 아낙네들은 카메라맨이 저 위 어딘가에서 촬영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몰랐을까요? 저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촬영한 것이었을까요, 그러면 몰래카메라인가요? 아니면 연출 사진이었을까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