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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IT] 기술유출 판례 (1) 벨웨이브의 삼성전자 휴대폰 기술유출

입력 | 2023-04-18 07:48:00


‘판례’란 법원이 특정 소송에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내린 판단입니다. 법원은 이 판례를 유사한 종류의 사건을 재판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합니다. IT 분야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의 속도보다 현저히 빠른 특성을 보여 판례가 비교적 부족합니다. 법조인들이 IT 관련 송사를 까다로워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을 거치며, IT 분야에도 참고할 만한 판례들이 속속 쌓이고 있습니다. IT동아는 법무법인 주원 홍석현 변호사와 함께 주목할 만한 IT 관련 사건과 분쟁 결과를 판례로 살펴보는 [그때 그 IT] 기고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출처=엔바토엘리먼츠


‘벨웨이브의 삼성전자 휴대폰 기술유출 판례’로 살펴본 기술유출 분쟁 (대법원 2003. 10. 30. 선고 2003도4382 판결 등)

“핵심연구원이 고액의 연봉과 성과금, 주식, 스카우트 비용까지 받고 이직했다면?”


핵심기술이 기업 경쟁력뿐만 아니라 국가 경쟁력까지 좌우하는 ‘기술패권 경쟁시대’입니다. 신기술 개발 못지않게 이미 개발된 핵심 기술을 유출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도 중요한 화두입니다. 기술유출의 대부분이 이직 또는 퇴직 과정에서 발생하는 만큼, 각 기업은 핵심 기술 인력의 이직 및 재취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 기업에 입사한 것이 확인되는 경우, 기술유출을 강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전자와 벨웨이브 사이 휴대폰 기술유출 갈등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발생했습니다. 삼성전자의 수석연구원이 벨웨이브의 임원으로 이직하면서 갈등이 촉발됐습니다. 해당 수석연구원은 약 16년간 삼성전자 산하 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유럽형(GMS) 휴대폰 기술개발 업무를 담당하다가 2000년경 휴대폰 제조업체인 벨웨이브의 GMS 휴대폰 사업부 이사로 이직했습니다.

벨웨이브는 중국 시장을 타깃으로 한 GMS 휴대폰 수출이 주력 사업이었고, GMS 휴대폰 기술개발 인력이 필요했기에 고액의 연봉과 성과금 등을 약속하며 삼성전자의 수석연구원을 채용했습니다.

그러자 삼성전자는 2002년경 기술유출 혐의로 벨웨이브 대표와 이직한 수석연구원 등을 검찰에 고발함으로써 칼을 빼 들었습니다. 삼성전자는 벨웨이브가 계획적으로 대기업 기술을 도용했고, 무엇보다 1급 대외비로 관리되는 국내 휴대폰 핵심기술을 중국으로 넘겼다며 강력한 처벌을 촉구했습니다. 또한 형사소송 진행 중 벨웨이브를 상대로 영업비밀 사용금지 및 영업비밀 침해에 따른 133억 4,000만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소속 연구원 및 기술유출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각사 로고. 출처=동아일보


이에 대해 벨웨이브는 문제가 된 수석연구원이 이직할 때 주변 기술자료(품질 체크표, 세미나 자료 등)를 개인적으로 가져온 것이고, 벨웨이브는 관계한 바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의 주장과 달리 중국으로 휴대폰 기술을 유출한 사실이 결코 없으며, 오히려 삼성전자에서 기술인력 누수에 대한 화풀이를 애먼 중소기업에 하는 것이라며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검찰은 벨웨이브 임직원 7명에 대해 업무상 배임,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으로 기소했습니다. 다만, 중국으로 휴대폰 기술을 유출했다는 점은 공소사실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전자 측 고발이 있었지만, 검찰에서는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 사실은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법정에서는 중국으로의 기술유출 여부보다는 전직 삼성전자 수석연구원이 가져온 휴대폰 신뢰도 체크리스트 등의 대외비 문건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벨웨이브 측에서는 해당 기능에 관한 해설자료가 삼성전자의 영문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미 올라가 있어 누구라도 다운받거나 수출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고 맞섰습니다. 더 이상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으나, 법원은 홈페이지에 게재된 자료와 유출된 자료는 상이하고 문제가 된 체크리스트는 삼성전자에 많은 인력과 자금을 투여해 만들어 낸 대외비로 분류한 휴대폰 관련자료이므로, 영업비밀에 해당한다고 판시했습니다(대구고등법원 2003노163).

그 결과, 전직 삼성전자 수석연구원에 대해서는 업무상 배임 및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이 인정돼 징역 1년 6개월이 확정됐습니다. 다만, 업무상 배임의 공범으로 문제가 된 벨웨이브 대표에 대해서는 상고심에서 무죄 취지로 원심판결이 파기환송 됐습니다(대법원 2003도4382).

1심과 2심 법원은 벨웨이브 대표가 전직 삼성전자 연구원과 함께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을 빼낸 공범이라고 판단했으나, 대법원에서는 위 연구원이 개인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대외비 파일을 시디롬과 디스켓에 저장한 후에야 벨웨이브 대표가 접촉했으므로, 휴대폰 기술유출 행위에 적극 가담했다고 볼 수 없어 업무상 배임죄의 공범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러한 재판 결과에 대해 벨웨이브 대표는 대기업의 휴대폰 기술유출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을 꾸민 사실은 결코 없지만, 부하 직원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삼성전자 측에서 영업비밀 침해 손해배상소송을 취하함으로써 양사 간 휴대폰 기술유출 공방은 종결됐습니다.

인재유출이 곧 기술유출이라 여겨지는 만큼, 핵심 기술을 가진 기업 입장에는 전문인력 유출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산업 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등에서 기술유출을 막기 위한 규제를 마련했으나, 이직 및 퇴직으로 인한 기술유출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기술을 유출해 사적인 이익을 보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위 벨웨이브 사례와 같이 영업비밀 해당 여부를 자의적으로 판단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회사의 전문인력을 채용하는 기업 입장에서도 기술유출에 대한 오해와 불필요한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다음 기고에서는 적대적 M&A를 이용한 기술유출로 문제가 됐던 ㈜BOE 하이디스 기술유출 판례(서울중앙지방법원 2009. 2. 17. 선고 2008고단4524 판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글 / 홍석현 법무법인 주원 변호사

홍석현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제4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로 일하다가, 현재는 법무법인 주원 파트너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정리 / 동아닷컴 IT전문 김동진 기자 (kdj@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