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간 협정에도 개인청구권 남아있다’는 말 日 법원이 청구권 행사 막으면서 내놓은 논리 日 정부 관계자가 언급할 때마다 보도되지만 맥락 알면 우리에게 유리하기는커녕 불리
송평인 논설위원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미국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그러자 3년 뒤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963년 도쿄 지방재판소는 소송을 기각하면서 다만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포기한 것은 외교보호권이며 배상청구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논리를 남겼다.
일본인도 강제노동 피해를 입은 역사적 경험이 있다. 패전 뒤 철수하지 못하고 소련 지역에 남아 있던 일본 장병 60만 명이 시베리아로 연행돼 가혹한 노동 착취를 당했다. 일본 정부는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서 강제노동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그러자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1997년 개인청구권은 남아 있지만 외교보호권은 없다는 똑같은 논리로 소송을 기각했다.
‘외교보호권 없는 배상청구권’은 실효성이 없는 허구의 권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외교 관계를 해치지는 않는다. 일본 정부는 판결 취지를 좇아 사법 밖의 영역에서 해결책을 추구했다. 원폭 피해자와 시베리아 억류 포로에 대해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한 것이다.
협정 당시 한국 측 이동원 외무장관이 상대한 일본 측 교섭대표는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다. 도쿄 지방재판소의 ‘외교보호권 없는 개인청구권’ 판결은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보다 2년 전에 내려졌기 때문에 시나 외상은 판결의 내용과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나 외상만이 아니라 고노 요헤이 외상 등 다른 일본 정부 관계자들도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해 왔다. 다만 그때마다 한국에서는 그들의 발언이 그 말이 나온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소개돼 오해를 빚었고 이번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할 때의 함의는 일본이 한국인 피해자 개인에게 추가로 갚아야 할 돈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돈을 주고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했으니 한국인 피해자 개인의 권리를 인정해 배상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할 일이라는 뜻에 가깝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배상액은 충분치 않았다. 또 배상은 주로 육체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것이었으며 정신적 피해에 대한 것은 없었다. 이런 이유로 협정 자체를 비판할 수는 있다. 당시 협정이 불평등했으니 협정을 새로 맺자고 주장하면 현실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주장 자체로는 논리적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명시한 협정을 그대로 놔두고 법원이 아무런 유보 없이 배상을 명해 버리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만다.
한국만 국가 간 협정으로 일본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거론했지만 일본도 미국과 소련에 대해 그렇게 했다. 일본 법원은 국가 간 협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유보 없이 배상을 명했다가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이상한 나라로 취급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외교보호권 없는 개인청구권’이라는 논리 모순의 권리 개념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중국과 달리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피해자에게 배상하기도 했지만 부족했을 것이다. 다만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대한 청구를 기각하고 한국 정부에 부족분을 청구하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개인청구권을 일본 법원의 허구적 권리와 달리 실제의 권리로 격상시켜 인권의 보루 역할을 다하면서도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왜 대법관들이 이런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돌아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