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7일 전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고유정이 제주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진술녹화실로 이동하고 있다. 경찰이 설치한 폐쇄회로(CC)TV에 포착된 영상을 캡처한 것으로 고 씨의 실물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 공개됐다. 동아일보DB
최혁중 사진부 차장
경찰에 잡힌 흉악범은 경찰서에서 법원으로 이송될 때 언론에 처음 얼굴이 노출된다. 이들은 마스크와 모자, 입고 있는 옷을 활용해 자신의 얼굴을 최대한 숨긴다. 사진기자들은 포토라인에서 자세를 낮추고 플래시를 터뜨려 모자 밑 그림자를 없애 이들의 눈빛을 찍는다. 최근 서울 강남 납치 살해 피의자 5명도 이렇게 노출됐다. 2019년 전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고유정은 고개를 숙이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커튼머리’로 사진기자들의 카메라를 무력화(?)시켰다. 현행법으로는 경찰이 강제적으로 머리를 들게 하거나 모자와 마스크를 벗길 수 없다. 경찰 수사공보규칙에는 ‘얼굴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돼 있다.
흉악범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돼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찬반 논란이 있다. 찬성 입장에서는 추가 목격자의 제보로 추후 사건을 예방하고 얼굴을 공개해 사회적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또 국민의 알 권리와 경각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도 본다. 반대 입장은 피의자의 인권 보호와 무죄 추정의 원칙 위배, 여론재판 금지 등을 근거로 내세운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중반까지 통상적으로 경찰이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고 이를 토대로 언론이 보도했다. 하지만 2004년 ‘밀양 여중생 성폭력 사건’에서 피의자의 신원 공개에 대한 비판 여론이 생긴 뒤로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게 대세가 됐다. 하지만 2009년 ‘강호순 연쇄살인사건’ 때 경찰은 경기 수원, 화성, 안산 등지에서 수차례 현장검증을 했는데 이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강호순의 모습이 계속 등장하자 ‘공개’ 여론이 높아졌다. 언론은 이 여론을 받아들여 자체적으로 맨얼굴 사진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도 2009년 2월 2일자에 강호순의 일상 사진을 입수해 기사와 함께 게재했다. 이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2010년 4월 15일 ‘특정강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피의자의 얼굴 등 공개’에 관한 규정을 두어 지금의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신상공개위)’가 생겼다.
그래서 미국처럼 체포한 범인을 식별하기 위해 경찰이 촬영한 ‘머그샷’을 공개하자는 여론이 높지만 이는 피의자의 동의가 필요해 현행법으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2021년 12월 ‘신변보호 가족 살인’ 피의자 이석준이 동의하면서 ‘머그샷’이 처음 공개됐는데 최근 6년간 신상공개 결정이 내려진 30여 건 중 이 건이 유일하다.
‘머그샷’ 공개는 신중해야 한다. 범죄 발생률이 다른 미국과의 단순 비교도 어렵다. 미국에서도 ‘머그샷’ 공개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한때 뉴욕주에서는 ‘머그샷’ 공개 폐지를 추진했었고 온라인에서는 1만 달러의 대가를 받고 ‘머그샷’을 지워주는 사이트도 등장해 화제가 됐다.
하지만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무죄 추정의 원칙’과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의 인권을 중요시하는 것이 문제라는 여론도 있다. 그래서 적어도 신상공개위에서 ‘공개’를 결정한 건에 있어서라도 ‘머그샷’ 공개가 꼭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송언석 국민의힘,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흉악범 신상공개 때 ‘실물에 가까운 사진’을 공개하도록 하자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3일 서울 수서경찰서에서 마스크와 모자로 ‘중무장’한 강남 납치 살해 피의자들의 모습을 취재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제대로 된 얼굴 사진 한 장이 날로 흉악해지는 범죄를 막고 범죄자에게 최소한의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진 않을까?’
최혁중 사진부 차장 sajin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