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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K뮤지컬”… 공동제작 통해 美-英-폴란드 등 세계로[인사이드&인사이트/이지윤]

입력 | 2023-04-19 03:00:00

K뮤지컬 해외 진출 본격 시동



‘MJ 더 뮤지컬’ ⓒMatthew Murphy. CJ ENM 제공.

이지윤 문화부 기자


《CJ ENM이 해외 제작사들과 공동 제작해 지난해 2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뮤지컬 ‘MJ 더 뮤지컬’이 올해 8월부터 시카고를 시작으로 북미 순회공연을 펼친다. ‘MJ…’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삶을 다룬 주크박스 뮤지컬로 ‘빌리 진’ ‘맨 인 더 미러’ 등 잭슨의 히트곡 25곡을 엮어 화제가 된 작품이다. 브로드웨이 극장은 한국과 달리 주간 단위로 결산해 매출액이 운영비보다 낮으면 바로 작품을 내린다. ‘MJ…’는 2021년 12월 프리뷰를 시작으로 지난해 2월 본공연이 흥행에 성공하며 1년 넘게 브로드웨이 52번가 닐 사이먼 극장에서 오픈런(기간을 정하지 않고 하는 공연)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MJ…’는 작품성도 인정받아 지난해 제75회 토니상에서 남우주연상과 안무상 등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내년 상반기에는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공연할 예정이다. 웨스트엔드 공연은 통상 글로벌 장기공연 작품으로 안착하기 위한 수순으로 여겨진다. 해외 유명 작품을 국내에 들여와 공연할 때마다 고액의 로열티를 지불하던 한국 뮤지컬 시장의 판도를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치밀해진 K뮤지컬 해외 진출

국내 뮤지컬의 해외 진출에 속도가 붙고 있다. 과거 아시아 시장에 창작 뮤지컬을 주로 수출한 것과 달리 최근 들어선 미국, 유럽 등 다양한 지역에 판권 판매 및 공동 제작 등 방식으로 진출하고 있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데스노트’를 제작한 오디컴퍼니는 이달 캐스팅 오디션을 거친 뒤 10월 미국 뉴저지 페이퍼밀 극장에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를 공연할 예정이다. 창작 뮤지컬 ‘마리 퀴리’ 제작사인 라이브는 최근 마리 퀴리의 고향인 폴란드로 작품을 수출하는 라이선스 계약이 성사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최종 계약이 될 경우 2020년 국내 초연 후 4년 만인 내년 5월 폴란드 비알리스토크의 포들라스카 극장에서 폴란드어 초연을 할 예정이다.

해외 유명작의 아시아 순회 공연권을 사들이는 경우도 있다. 뮤지컬 ‘웃는 남자’ ‘엘리자벳’을 제작한 EMK는 최근 웨스트엔드 뮤지컬 ‘시스터 액트’의 아시아 지역 영어 공연권을 확보했다. 2009년 웨스트엔드 초연 후 세계에서 누적 관객을 600만 명 이상 모은 인기작이다. EMK는 2025년부터 한중일을 비롯해 싱가포르, 마카오, 홍콩 등에서 ‘시스터 액트’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브로드웨이와의 공동 제작, 해외 공연권 확보는 시장을 해외로 확장하기 위한 장기적 전략이다. 뮤지컬 ‘킹키부츠’ ‘물랑루즈’를 브로드웨이와 공동 제작한 CJ ENM의 예주열 공연사업본부장은 “기본 목표는 투자 수익을 배당받고 국내외 공연권을 확보하는 것이지만 5년 후 ‘우리가 100% 만든 작품’을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며 “미국, 유럽은 탄탄한 네트워크와 경험치가 쌓여야 진입할 수 있는 까다로운 시장인 만큼 10여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기반을 다지고 있다”고 말했다.




●포화상태 내수 시장의 돌파구 찾아라

2011년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선보인 한국 창작 뮤지컬 ‘영웅’. 에이콤 제공

1995년 초연된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는 K뮤지컬 해외 진출의 원조다. 아시아 작품으로는 처음 1997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고, 2002년 웨스트엔드와 200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공연했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 마지막 1년을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은 2009년 국내 초연 후 2011년 브로드웨이에서, 2015년 안 의사의 의거 현장인 중국 하얼빈에서 공연됐다.

다만 이런 시도들은 일회성 공연에 그쳤다. ‘명성황후’와 ‘영웅’의 브로드웨이 공연 기간은 각각 열흘뿐이었고 상업 공연보다는 문화 교류에 가까웠다는 평을 받는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한국인으로서 처음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한 뮤지컬 ‘할러 이프 야 히어 미’(2014년)는 전설적인 래퍼 투팍(2Pac)의 히트곡을 활용했지만 대본과 이야기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으며 흥행에 실패했다. 매주 투입된 운영비 50만 달러(당시 약 5억2000만 원)를 매출액이 따라잡지 못해 한 달이 채 못 돼 조기 종영됐다.

전문가들은 과거 한국 뮤지컬이 해외 진출에 실패한 건 치밀한 현지화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원종원 순천향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는 “과거에는 해외 시장을 뭉뚱그려 생각해 국가별로 다른 속성과 산업 구조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국내에서 공연하던 작품, 제작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져가곤 했다”며 “최근 해외 진출 방식은 전보다 영리해지고 체계화됐다”고 평가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 배경에는 한국 뮤지컬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데다, 높은 제작비로 수익성이 낮아진 측면이 있다. 신 대표는 “국내 시장은 양적, 질적으로 빠르게 성장했지만 시장 규모에 한계가 있다”며 “콘텐츠의 확장성과 파급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해외 시장을 겨냥해야 한다”고 말했다.




●“K콘텐츠 열풍, K뮤지컬 성공 가능성 높여”

해외 대형 제작사가 국내 제작사와의 협업을 적극 타진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이온킹’을 제작한 디즈니 시어트리컬 프로덕션은 최근 에스앤코와 클립서비스, 샤롯데씨어터를 운영하는 롯데컬처웍스와 디즈니 인기 작품을 한국어로 공동 제작하는 협약을 맺었다. 과거에는 제작사와 일대일 계약만 했다면 유통사, 극장도 함께 계약해 제작 속도를 높이는 것. 첫 작품은 내년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선보일 ‘알라딘’이다. 설도권 클립서비스 대표는 “단기 공연 위주의 국내 공연시장에 알라딘은 장기 공연이 가능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3∼4년 새 한류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며 한국 콘텐츠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긍정적이다. 2010년대 일본에서 제2차 한류 붐이 불자 ‘모차르트!’ ‘금발이 너무해’ 등 K팝 아이돌이 출연하는 한국 뮤지컬이 라이선스 형태로 매년 수출된 데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원종원 교수는 “대중음악, 영화 등은 한 콘텐츠를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원소스 멀티유스’가 용이해 인기를 얻은 K콘텐츠가 뮤지컬 제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실제 공연계에 따르면 최근 브로드웨이에서는 한국 영화와 대중음악이 뮤지컬 소재로 논의되는 추세다. 지난해에는 현지 프로듀서가 제작한 뮤지컬 ‘KPOP’이 무대에 올랐다. K팝 연습생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엎드려(Up Du Ryuh)’, ‘한국놈(Han Guk Nom)’ 등 넘버로 구성됐다.

뮤지컬계가 10여 년간 진출과 후퇴를 반복하며 쌓은 경험도 자산이 된다. 박병성 뮤지컬 평론가는 “1세대 프로듀서들이 해외 시장에서 축적한 노하우와 네트워크가 최근 더 영리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진화해 해외 관객에게 접근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제작사 26곳이 모여 출범한 한국뮤지컬제작사협회는 브로드웨이 리그와 파트너십을 체결해 해외 시장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다지는 중이다.

한국 뮤지컬이 해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병원 라이브 대표는 “영화진흥위원회처럼 뮤지컬만을 관리하는 기관이 설립돼 더 전문적이고 체계화된 육성 정책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다. 지혜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작품 위주로 지원하는 현행 방식 대신 현지 시장에 대한 창작진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지윤 문화부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