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 존재감 클수록 대통령은 작아져 이미지 메이킹 돕되 한 걸음 뒤에 서야
이진영 논설위원
미국에선 퍼스트레이디 지지율 조사도 정기적으로 한다. 여러모로 이례적이었던 트럼프 시대를 제외하면 역대 영부인들은 임기 말에도 대통령 인기와 무관하게 높은 지지율을 누렸다. CNN과 갤럽이 닉슨 대통령 집권기 이후 역대 영부인들의 임기 말 지지율을 집계했더니 평균 50%였다. 유일한 예외가 힐러리 클린턴으로 고작 13%다. 백악관을 나와 국무장관으로, 유력한 대선 후보로 승승장구했던 그가 왜 영부인 시절 인기는 없었을까.
답은 잠시 접어두고 김건희 여사 얘기부터 해보자. ‘조용한 내조’를 하겠다던 김 여사가 요즘 대통령 못지않은 강행군을 하고 있다. 이달 들어 17일간 공개 일정만 15개다. 같은 기간 대통령 공개 일정은 24개였다. 대통령실이 공개한 ‘사진뉴스’를 보면 김 여사 사진이 229컷으로 대통령 사진(203컷)보다 많다.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물보호단체 관계자들과 비공개 오찬을 하며 “개 식용을 정부 임기 내에 종식하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저의 본분”이라고 했고, 납북자와 억류자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선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에 강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엔 김 여사의 대학원 최고위과정 동기가 의전비서관으로 기용됐다. 개고기 식용 금지는 대통령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의견 수렴을 하는 중이다. 민감한 정책과 인사 문제에서 김 여사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영부인의 정책 관여는 ‘선’을 넘는 일이어서 리스크가 훨씬 크다. 선출된 자리도 아니면서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정에 관여하는 건 ‘민주주의를 우롱하는 것’이라는 게 민심이다(프랑스 정치학자 피에르마리 루아조). 힐러리 여사가 주요 국정과제였던 의료보험 개혁을 직접 챙기다 실패하자 대통령 지지율까지 추락했다. 대선에 처음 도전하며 똑똑한 힐러리를 앞세워 ‘하나 사면 하나는 공짜’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에 나설 때는 ‘빌러리(빌+힐러리)’의 ‘ㅂ’자도 못 나오게 했다. 힐러리 여사에 대한 여론이 가장 우호적이었을 때는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다. 그는 “어떤 결혼이든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며 남편 곁을 지켰고, 대통령의 지지율도 거짓말처럼 올랐다.
시대착오적 여성관 아니냐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 쟁취한 권력이 아니라 힘 있는 남자에 기대어 영향력을 갖는 영부인 제도가 굴욕적이라며 아예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로펌 변호사 시절 오바마 대통령의 멘토였던 미셸 오바마가 백악관에 들어간 뒤론 건강 전도사 역할에 머물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화 동지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로 한국의 영부인들 중 남편과 가장 동등한 관계였던 이희호 여사도 “대통령 부인이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는 데 부정적인 시각이 많더라”라며 조심스러워했다.
영부인은 대통령의 자산이자 위험 요소다. 대통령보다 한두 걸음 뒤에서 조용히 내조하면 자산이 되고, 대통령 앞에 서려 할수록 리스크가 된다. 힐러리 여사처럼 남편 임기 이후의 개인적 기획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면 정치 전문가들이 조언하듯 “이미지 메이킹엔 협조하되, 권력은 나눠 갖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