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골목골목마다 비린내가 풍겼다. 굴비의 본고장에 서 있음을 냄새로 느낄 수 있었다. 전남 영광군 법성포는 인도 간다라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첫발을 디딘 포구로 알려져 있다. ‘성인이 불교를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가 법성포(法聖浦) 지명에 들어 있다. 간다라 유물관, 간다라 형식 탑 등이 조성된 ‘백제 불교 도래지’를 방문한 나는 갯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나먼 곳에서 바닷길을 건너온 마라난타는 곧장 포구에 닿지 못하고 물때를 기다렸다가 백제 땅에 발을 디뎠을 터. 칠산어장에서 잡은 조기를 실어 나르기 위해 수많은 배가 밀물을 기다렸다가 일시에 포구로 들어왔듯이.
포구는 한산했고, 관광버스는 물밀듯 몰려들었다. 칠산어장에 조기가 나타나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됐건만, 법성포 굴비 명성은 이어지고 있었다. 바닷가의 즐비한 굴비 점포를 뒤로하고,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다닌 끝에 굴비 손질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말을 건넸더니 친절하게 응수하며 굴비를 찢어서 맛보라고 했다. 주인장은 신이 난 듯 굴비에 대해 설명했다. “예전에는 칠산어장에서 잡은 조기로 굴비를 만들었어요. 요즘은 조기가 북상하지 않으니 추자도와 제주도 남쪽 바다에서 잡은 걸 사용합니다. 법성포에 굴비 점포만 500개가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비린 맛이 강하면 안 먹지만, 굴비 특유의 냄새와 감칠맛을 아는 사람들은 속성으로 만드는 굴비를 싫어해요.” 한평생 굴비와 함께한 주인장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굴비에 대한 자부심은 굴비 유래담에도 보인다. 이자겸이 영광으로 유배 왔을 때, 자신을 내친 인종에게 굴비를 바치며 “진상은 해도 굴복한 것은 아니다”라며 굴할 ‘굴(屈)’, 아닐 ‘비(非)’를 쓴 데에서 굴비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화다. 사물이나 이름이 생겨난 이유를 민중이 재밌게 꾸며 전하는 허구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기세등등하던 이자겸이 쫓겨난 곳이 하필 영광이었고, 한때 왕권을 농락할 정도의 권세를 과시하던 이자겸조차 굴비 맛에 반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굴비에 대한 자부심이 이야기 속에 녹아 있다.
1970년대 이후 조기는 서해로 북상하지 않지만, 법성포는 여전히 굴비 명성을 잇고 있다. 반면 연평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조기잡이 신을 찾지 않는다. 소연평도 제당은 폐허가 된 지 오래고, 임경업 장군 신앙의 성지인 대연평도 충민사 역시 인적이 드물다. 조기가 없는데 조기잡이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