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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보니 XX네ㅋㅋ” 말로 휘두른 주먹, 뇌에 흉터 남긴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입력 | 2023-04-23 10:00:00


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다룹니다. 일상 속 심리적 궁금증이나 고민이 있다면 이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기사로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악성 댓글 다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2)

일부 악플러는 익명성과 군중심리 뒤에 숨어 독한 악플을 달고도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여기지만 말로 준 상처는 실제로 때린 것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경찰 앞에서 최대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
“초범이고 우발적으로 썼다는 점을 적극 어필해라”
“댓글 쓸 땐 걸리지 않게 돌려 까라”

일부 온라인 누리꾼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악플로 고소당했을 때 대처법’이다. 연예인, 정치인, 일반인까지 하루가 멀다고 악플과 씨름하는 이들의 기사가 나오고 있지만 정작 악플러들은 지칠 줄 모른다. 오히려 “욕할만하니까 한다”며 비판을 넘어 외모 비하, 허위 사실 유포, 성희롱, 욕설 등 심각한 수위를 넘나든다. 악플 대응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 시장도 덩달아 커졌다.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들이 유명을 달리한 여러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악플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올까. 지난주 기사(“나는 조롱한다, 고로 존재한다” 악플러의 심리)에 이어 악플 쓰는 심리적 이유에 대해 알아본다.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
악플러를 잡고 보니 두 딸을 둔 40대 가장이었다거나 평범한 주부, 직장인, 학생이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누구라도 이름, 나이, 직업 등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ID 뒤에 숨으면 평소보다 일탈 행동에 자유로워진다. 온라인 댓글에선 누구도 나를 알아볼 염려가 없기에 규범을 덜 지켜도 되고 공격성이나 폭력성도 쉽게 드러난다.

미국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의 실험에 따르면 자신의 얼굴, 이름 등이 노출되지 않았을 때 타인에게 더 잔인하게 행동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의 유명 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는 익명성과 폭력성의 관계를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실험 참가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고 한 집단에는 마스크를 쓰고 가운을 입게 해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다른 집단에는 얼굴을 공개하고 이름표까지 붙였다. 그런 뒤 두 그룹 모두에게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이 과제를 잘못했을 때 정신 차리도록 전기 충격을 주라고 지시했다. 물론 전기 충격 장치는 가짜였다. 둘 중 어느 그룹이 전기 충격 버튼을 오랫동안 눌렀을까?

신원을 가린 참가자들이 전기 충격 버튼을 훨씬 오래 눌렀다. 앞서 신원을 밝힌 집단은 실험 시작 전 서로 이름을 말하며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얼굴 보며 상호작용했던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기 꺼렸지만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익명 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공격성이 드러난 것이다.




함께 할 때 강해진다…익명성 보다 강한 동조 현상
견해가 일치하는 사람들끼리 다 같이 행동에 나서면 혼자 있을 때보다 더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이 경우에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군중심리에 의해 평소보다 공격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15일(현지 시각) 미국 시카고 시내 한복판으로 쏟아져 나온 1000여 명의 청소년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이날 시내 곳곳에서는 청소년들의 방화, 폭력, 총격 사건이 벌어졌다. 뉴시스

실제로 지난 15일(현지 시각) 밤 미국 시카고에서 10대 청소년 1000여 명이 밀레니엄파크와 상가, 도로에 난입해 행인을 폭행하고 차를 부수는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시카고시에서 주말 야간 시간에 보호자 동반 없이 청소년의 밀레니엄파크 출입을 금지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청소년들이 자유를 달라며 반대 시위에 나선 것이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틴 테이크오버(Teen Takeover·10대들의 도시 탈취)’라고 홍보가 되면서 순식간에 1000여 명이 거리로 나왔다. 총격 사고로 팔과 다리에 총상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이 시위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았지만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이 한꺼번에 행동하면서 강한 폭력성이 표출된 것이다.





같은 편이 악플 달면…참전 욕구↑
온라인에서 같은 견해를 가진 이들끼리 집단으로 악성 댓글을 다는 행위도 이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공격적인 댓글을 쓸 생각이 없었더라도 같은 편이 쓴 악플에 자극받아 쉽게 동조하는 것이다. 정치적 이념이나 응원하는 스포츠팀에 따라 훌리건처럼 극성팬들이 편을 가르고 악플로 싸우는 것은 이런 영향이 크다.

경기장 안팎에서 종종 폭력 사태를 일으키는 스포츠팬인 훌리건들은 함께 몰려다니기 때문에 공격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인스타그램 캡처

독일 보훔루르대 레오니 뢰스너 박사 연구팀의 연구는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준다. 연구팀은 실험참가자들에게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나뉘는 기사에 익명으로 댓글을 달거나 자신의 이름과 사진이 노출된 페이스북 ID로 댓글을 달도록 했다. 댓글 동조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연구진은 이들이 읽는 기사에 미리 댓글들을 달아놨다. 한 기사에는 이성적이고 차분한 표현의 댓글을, 다른 기사에는 공격적인 악플을 달았다.

사람들이 공격적인 댓글을 가장 많이 단 경우는 앞서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악플이 이미 달려 있을 때였다. 이때 익명성 보장 여부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앞서 달린 댓글들이 공격적이지 않고 이성적인 내용일 때는 자신도 비슷한 수위를 지켜가며 댓글을 달았다. 연구팀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악플에 영향을 받아 또 다른 악플을 쓸 수 있다”고 했다.






한눈에 보고 쉽게 판단…검열 없이 일단 배설
많은 국내외 연구에서 공통으로 꼽는 악플러의 또 다른 심리적 특성은 충동성이다. 악플러들은 댓글을 쓰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 바로 글로 옮겨 버린다. 실제로 악플러의 댓글 패턴을 분석해봤더니 부정적인 정서 표현을 순화하지 않고 급하게 쏟아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터넷 악성 댓글과 일반 댓글의 언어적, 심리적 특성 비교 연구’ 논문에서 습관적 악플 작성자 25명의 댓글 약 1만 개를 분석했다. 그 결과 악플러들은 온전한 문장보다 조사나 서술어가 빠진 짧은 비문을 많이 썼다. 또 ‘닭대가리’나 ‘꺽다리’처럼 대상의 특징을 잡아 비난하는 명사를 자주 썼다.

또 이들이 비난하는 주제는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외모 지적이 대부분이었다. 대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댓글을 쓰는 게 아니라 한눈에 보이는 대로 빠르게 판단하고 낙인찍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인지 처리가 즉각적이라는 것은 자기 검열이 제대로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로 휘두른 주먹, 뇌에 흉터 남긴다
누군가는 별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내지른 말일지라도 듣는 사람에게는 평생 상처로 남을 수 있다. 말로 준 상처는 신체를 때린 것보다 심각한 흉터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정범석 카이스트 교수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 29명을 대상으로 그동안 거친 말을 얼마나 들었는지 조사하고 이들의 뇌를 MRI를 통해 살펴봤다. 살면서 거친 말을 많이 들은 아이들일수록 뇌에서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해마 크기가 작았고, 뇌의 회로 발달이 늦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언어폭력을 당한 그룹뿐 아니라 언어폭력을 한 그룹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점이다. 말을 뱉으면서 동시에 자신도 거친 말을 듣기에 자신의 뇌도 망가진 것이다.

거친 말을 하는 학생과 거친 말을 많이 듣는 학생의 뇌는 같은 부위의 발달이 위축돼 있었다. EBS ‘다큐프라임’ 화면 캡처

언어폭력은 우울증 같은 정신적 고통까지 불러올 수 있다. 마틴 테이처 하버드 의대 정신과 교수는 18~25세 남녀 848명 가운데 어린 시절 다른 학대는 겪지 않았지만 또래나 부모 등에게 오직 언어적 학대만 겪었던 63명을 선정해 MRI(자기공명영상)로 뇌를 촬영했다. 이들에게 공통된 특징이 발견됐는데, 뇌량과 해마 부위가 위축돼 있었다. 뇌량은 우뇌와 좌뇌를 연결하는 부위이기 때문에 뇌량이 손상되면 뇌 양쪽의 교류가 불안정해져 감각 경험이나 기억을 저장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기억을 저장하고 감정을 담당하는 해마가 손상되면 쉽게 불안해지고 우울증을 겪을 가능성이 커진다. 연구팀은 “언어폭력에 노출되면 정상보다 우울증 발병은 2배 이상, 불안증은 3~4배로 증가했다”며 “말로 조롱, 경멸, 굴욕을 겪는 것은 정서적으로 굉장히 유해하고, 뇌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