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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딸린 기자의 이름 그리고 보상[청계천 옆 사진관]

입력 | 2023-04-22 11:00:00

백년 사진 No.15




▶ 요즘 신문에 실리는 기사나 사진에는 기자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바이라인(by-line) 또는 크레디트(credit)라고 합니다. 김규회·이재근의 책 《신문과 저작권》(서울: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저작권 위원회)에 따르면 “‘OOO 기자’라고 표시한 것은 기자가 업무상 작성한 것으로서, 그 자료의 출처와 신빙성 그리고 작성자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업무분담 표시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서는 기자의 이름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기사가 나열되고 사진이 실릴 뿐, 누가 기사를 썼는지 누가 찍은 사진인지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기사와 사진에는 기자의 이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경상북도 포항에서 배 한 척이 전복되어 어부 한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파도에 찢겨진 배가 강가에 뒤집힌 채로 서 있습니다. 1923년 4월 21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포항에 우 복천선-19일 오전 풍랑으로 인하야 한 명이 빠져 죽고 다섯명 구원. 포항에서 특파원 설의식 발전>

19일 오전 10시20분경에 포항면 학산동에 있는 대전조의 어부 5명과 그 동리 38번지 신상룡이가 종선을 타고 학산동으로부터 향도로 향하여 형산강의 어구를 건너갈 때에 풍랑이 심하여 배가 엎어져서 대전조의 5명은 구조되고 신상룡은 헤엄을 칠 줄 모름으로 마침내 빠져죽었는데 이 급보를 접한 경찰대는 수 척의 배를 타고 그물질을 하여 시체를 수색 중이나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고 신상룡의 부모형제는 강변에 모여서 미칠 듯이 야단을 치는 광경은 이루 형언할 수 없으며 강물은 비로인하여 사오척이나 늘었고 폭풍으로 인하여 물살은 보통 때보다 석자나 높은데 형산강은 깊이가 삼십척 넓이가 삼십간 가량의 적은 강 이더라(19일 오후 포항에서 특파원 설의식 특전)

▶ 기사의 제목에서 특파원이 기사를 보냈다며 이름을 언급했는데 기사 끝 부분에서도 또 특파원의 이름을 표기했다는 점입니다. ‘발전’ 또는 ‘특전’ 모두 기사 또는 사진을 멀리서 서울로 보냈다는 표현입니다. 6명의 어부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전복했는데 5명은 경찰에 의해 구조되고 1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인데, 당시로서는 아주 큰 뉴스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너무 크게 다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옆의 기사를 읽어보니 사진이 찍힌 19일 이전인 4월 15일에 포항에는 폭풍우로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해변가에 즐비한 시체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기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기자가 급히 내려간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대참사 현장 사진이 아닌 다른 사고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뉴스 밸류는 며칠 전 일어난 대참사가 크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 포항에서 일어난 재난이라 기자들이 사건 발생 시점에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현장이 육지에서 떨어진 바다 한 복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다른 배가 육지 가까이서 난파되어 카메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어 신문에 실린 것으로 이해됩니다. 비록 대참사 현장을 기록한 사진은 아니지만, 이틀 전 발생한 사건을 48시간이 되지 않은 시간에 취재하고 사진촬영까지 해 지면에 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지금의 기준 말고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신문사로서는 대단히 많은 역량을 투입해 뉴스를 수집하고 독자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교통편이 좋지도 않았던 시절, 서울에서 포항까지 기자들이 내려가 사진까지 서울로 올려 보냈다는 점에 주목해 볼 만합니다. 지금이야 사진을 찍는 순간 서울 본사에 있는 편집자들이 사진을 받아볼 수 있고, 바로 인터넷에 띄울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아주 힘든 과정이었을 겁니다. 사진 전송기가 있었을 리는 없으니 인편 또는 차편으로 서울로 필름을 올려보내 현상하고, 인화한 후에야 신문에 프린트할 수 있었을 겁니다. 19일에 일어난 일을 21일자 신문에 사진으로 실었다는 건 굉장히 빠르게 보도한 것이고 그만큼 현장에 대한 신문사 내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는 뜻일 겁니다.

▶100년 전 포항 사고 현장을 맡았던 기자는 누구일까요? 현장 취재를 맡은 기자의 이름은 설의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아일보 사사를 살펴보니 설의식 기자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편집주간을 지낸 소오 설의식은 1922년 동아일보에 입사, 일장기 말소사건과 1940년 강제폐간 시기를 제외하고 1947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청·장년기를 동아에 몸바친 ‘동아맨’이었다.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설의식은 2년7개월 만에 사회부장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동경특파원, 편집국장대리를 거쳐 1935년 편집국장에 오른다…(중략)이처럼 동아일보 사람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한 그였지만 일장기말소사건이 터지면서 하루아침에 회사를 떠나게 된다. 편집국장 취임 1년 남짓만인 1936년 8월이었다. 언론계를 떠난 소오는 광산일에 종사하면서 단파라디오를 통해 얻은 일제의 전황과 시국변천 정보를 몰래 송진우에게 알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된 동아일보가 해방후 복간되자 설의식은 다시 주간겸 편집인으로 복귀했다. 9년만이었다. 1945년 12월1일자에 실린 중간사(重刊辭) ‘主旨를 宣明함’의 집필자는 막 복직한 ‘평생 동아맨’ 설의식이었다.”

▶ 1922년에 기자가 되었으니 포항 사고 현장에 간 것은 2년차 때의 일이네요. 설의식 기자가 1900년생이라는 기록도 있고 1901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20대 초반의 신참 기자가 수천 명이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현장에 파견되어 취재를 했습니다. 재난 현장을 직접 보고 기록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합니다. 100년 전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신문사에서는 그가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큰’ 지면으로 다뤄 독자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사랑하고 기자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았던 젊은 기자는 지면으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누군가 인생을 걸었던 신문 지면을 또 다른 누군가 100년이 지난 후에 들춰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쇄매체의 장점과 함께 무거운 책임도 느낍니다. 영원히 남을 지면이기에 그 당시 그 분도 엄청 애를 쓰셨을 겁니다.

사진의 오른쪽 부분


▶ 이 사진을 찍은 사람도 설의식 기자였을까요? 사진기자인 제가 볼 때는 아닐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사진기자라는 명칭도 없었고 사진을 기술의 영역으로 봤기 때문에 신문에 사진 찍은 사람의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글을 쓰다보니 자꾸 가능성만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독자 여러분께는 죄송합니다만 아직 정확한 고증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확실한 사실이 정리되면 꼭 공유드리겠습니다).
사진의 깔끔한 구도와 정확한 노출값 계산 등을 고려할 때 저 사진은 전문가가 촬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20대 초반의 취재기자가 저 정도의 사진 기술을 구사했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취재기자의 바이라인은 명확하게 들어갔지만, 재난 현장을 촬영한 사진가의 이름은 지면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혹시 설의식 기자가 찍은 사진이라면 그는 글과 사진 모두 완벽한, 천재 기자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