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완벽한 악인
아직 2023년의 봄이지만, 2023년 최고의 인기 드라마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될 것이다. ‘더 글로리’의 열기가 제법 가라앉은 요즘에도 나는 사라(김히어라 분)의 욕설 연기가 담긴 동영상을 돌려보곤 한다. 타락한 목사의 딸인 사라는 정확한 억양으로 숙련된 욕설 솜씨를 선보인다. 그 찰진 욕설을 듣다 보면 묵은 피곤이 풀리고 심신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정점에 이른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숭고미가 있기 마련이다. 어설픈 악인은 짜증을 불러일으키지만, 단 한 점의 선함도 없는 완벽한 악인, 그러니까 악의 이데아 같은 캐릭터는 그 나름대로 어떤 경탄을 자아낸다.
배우 김히어라의 능수능란한 욕설은 욕설의 이데아다. 완벽한 억양과 호흡으로 구사된 그 욕설은 거듭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팬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절정에 다다른 욕설 연기는, 욕설에도 급수가 있다는 당연한 진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욕이나 비판이나 풍자에 접할 때 우리는 그 욕이 타당한 욕인지 아닌지에 관심이 쏠린 나머지 욕의 구사 수준에 대해서는 무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욕설이라고 다 같은 욕설이 아니다.
아무나 다 욕설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편이 아니라고 그저 거칠게 욕부터 날리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았나. 조악한 욕설이나 비판은 바람직하지 않다. 설령 욕먹는 대상이 욕을 먹어 마땅한 경우라도 그렇다. 왜냐? 그런 욕이나 비판은 메시지가 직관적으로 잘 전달된다는 강점은 있지만, 이미 비판하고 싶었던 사람들만 결집할 뿐, 새로운 동조자를 만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조악한 욕은 욕설의 수준을 끌어올릴 소중한 기회를 낭비한 것이며, 욕먹는 이의 감수성을 혁신할 찬스를 앗아간 것이며, 욕을 통해 정화되고 싶었던 관객을 실망시킨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의 권위는 대단하다. 대단한 만큼, 꾸준한 찬양뿐 아니라 집요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오기도 했다. 예술의 역사에는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한 작품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16세기에는 육욕에 무너지는 성직자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들이 흔했다. 플랑드르 지역 화가 코르넬리스 판하를럼이 그린 ‘사제와 수녀’ 같은 작품은 성직자 간의 비행(非行)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보는 순간, 관객은 이 그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그림은 기존 가톨릭 비판자들의 즉각적인 동조를 얻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보고 난 뒤, 뭔가 마음이 정화되거나 감수성이 혁신되거나 새 지평이 열리는 듯한 느낌은 없다.
1650년 스페인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왼쪽)과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본뜬 습작’(1953년 작·오른쪽). 베이컨은 고통받는 듯한 교황의 모습을 그려 원작에 담긴 교황의 권위를 비틀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벨라스케스의 이 유명한 초상화를 혁신적으로 재구성한다. 권위적인 붉은빛은 공포에 찬 보랏빛으로 바뀌고, 앙다물었던 입술은 고통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벌어져 있다. 배경은 권위적으로 붉지 않고, 그저 캄캄할 뿐. 그 캄캄한 어둠을 가르는 빛에 의해 교황은 은총을 받기는커녕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이다. 그가 앉았던 전례용 의자는 이제 전기 고문의자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교황이 고통받고 있다! 신은 대체 어디 있는가! 교황은 비명을 지르고, 신은 침묵한다. 베이컨의 작품은 단순히 교황을 조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의 침묵이라는 심각한 이슈를 제기한다.
이탈리아 출신 현대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아홉 번째 시간’.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묘사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제공, 사진 김경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