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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터지는 ‘숄칭’ vs 속 시원한 ‘유닝’[오늘과 내일/이철희]

입력 | 2023-04-26 21:30:00

각국, 주변 살피고 내부 다지며 신중 행보
尹 ‘직진외교’ 역풍도 감당할 준비돼 있나



이철희 논설위원


올해 초 유럽에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의 사진 옆에 그의 이름을 동사형으로 만든 신조어 ‘숄칭(scholzing)’을 사전 스타일로 풀이한 온라인 패러디 게시물이 유행했다. 숄칭의 뜻은 이랬다. ‘좋은 의도를 표명하면서도 그것을 미루거나 막기 위해 상상 가능한 어떤 이유든 이용하거나 찾아내거나 지어내는 것.’ 우크라이나에 독일제 전차 레오파르트2를 지원하는 문제를 놓고 몇 주 동안이나 시간을 질질 끄는 숄츠에 대한 신랄한 조롱이었다.

당시 유럽 곳곳에선 ‘표범(레오파르트 전차)을 풀어줘라(Free the Leopards)’는 피켓 시위가 벌어졌고 트위터에선 표범 무늬 옷을 입은 사진을 올리는 릴레이 캠페인까지 벌어졌다. 여기엔 핀란드 총리도 동참했다. 실제로 숄츠는 막판까지 미적거렸다. 지원할 전차가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다가 미국이 에이브럼스 전차를 지원하겠다는 발표가 나온 뒤에야 레오파르트2 지원을 최종 승인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넘게 이어지는 동안 숄츠는 끊임없이 망설였다.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했던 작년 1월엔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에 각종 무기를 보내는 상황에서 헬멧 5000개를 보내 “다음엔 뭘 보낼 건가. 베개냐?”고 조롱당했다. 그런 독일에 대한 주변국 여론은 따가웠다. 일부에선 “전시에 적을 이롭게 하는 배신 행위”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하지만 숄츠는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을 받자 “숄칭은 ‘독일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받아넘겼다. 그렇다고 독일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쟁 지역에 살상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뒤집고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필두로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군사 지원을 했다. 다만 그처럼 꾸물거린 것은 앞장서는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대놓고 러시아와 척지는 일은 피하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독일은 러시아와 적대관계로 맞설 가능성에도 면밀히 대비했다. 그간 러시아에 의존하던 천연가스를 대체하기 위한 에너지 인프라 건설에 집중하면서 1000억 유로의 특별방위기금을 조성해 군사력 증강에도 나섰다. 그렇게 내년까지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로 끌어올리면 독일은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의 군사비 지출 국가가 된다.

끊임없이 살피고 따져보는 대외 행보는 숄츠의 독일만이 아니다. 신냉전 대결이 격화하면서 많은 나라가 미국과 중·러 사이에 걸터앉아 ‘다(多)동맹 전략’ ‘360도 외교’를 펴고 있다. 미국과의 확고한 밀착을 추구하던 일본도 요즘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은 최근 미중 대결의 과열 양상을 우려한 듯 ‘중국과의 건설적이고 안정적 관계’를 새삼 강조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며칠 전 외신 인터뷰에서 ‘중국의 패권 야망을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면서 즉답을 피했다고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기시다는 대신 “중국과의 적극적 외교를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고 답했고, 인터뷰 자료를 흘끗흘끗 보며 중일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한 외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과 대만 문제에 관한 ‘원론적 발언’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의 가치관과 신념이 반영된 상식적 답변이라는데, 그간의 정책 기조를 뛰어넘는 소신 발언이 낳을 역풍까지 염두에 뒀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속 시원한 원칙 천명과 직진 외교가 당장 동맹의 박수를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뒷감당까지 동맹이 떠맡아 주진 않는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