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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웨이’ 앙코르곡이 남긴 바이올린 대모의 인생 궤적[광화문에서/김정은]

입력 | 2023-04-27 21:30:00

김정은 문화부 차장


최근 74세로 별세한 ‘한국 바이올린의 대모’ 김남윤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2014년 11월 2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정년 기념 음악회’의 앙코르곡 연주 순간이다.

그는 이날 김대진 한예종 총장의 지휘에 맞춰 수원시립교향악단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협주곡’,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등을 90여 분간 협연했다. 연주를 끝낸 뒤 2000여 석을 가득 메운 청중의 환호에 무대 인사를 하던 그에게 깜짝 이벤트가 펼쳐졌다. 수원시향 단원들과 콘서트홀 뒤편 합창석에 청중으로 앉아 있던 100여 명의 제자들이 공연 내내 숨겨놨던 바이올린을 꺼내 든 뒤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 이 곡은 평소 김 전 교수가 즐겨 듣던 노래였다.

제자들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엄하고 카리스마 넘치기로 유명한 김 전 교수였다. 하지만 제자들이 준비한 ‘깜짝 선물’에 흠칫 놀란 그는 뒤돌아선 채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았다. 청중 역시 기립박수로 38년간 국내 바이올린 교육을 이끈 그의 지난 세월에 경의를 표했다. 이날 많은 클래식 명곡이 연주됐지만 제자들이 연주한 앙코르곡 ‘마이 웨이’는 스승과 제자 간의 사연이 더해져서 그런지 가장 인상적이었다.

9년 전 그날의 공연을 녹화 중계했던 한 방송사의 영상 편집본이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제자들이 스승님께 바치는 감동의 앙코르’라는 제목의 쇼트폼 영상으로 올라오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해당 영상엔 “클래식을 잘 모르지만, 훌륭한 스승이었던 것 같다”는 댓글이 다수 달렸다.

그가 존경받는 스승으로 손꼽힌 배경에는 ‘프로 정신’과 ‘인간미’라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15년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 전 교수에 대해 “레슨할 때 빼고는 어머니 같다. 밥 먹었냐고 항상 물어봐 주시고, 사소한 것들도 많이 챙겨주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랬다. 김 전 교수의 옆방 연구실을 썼던 김대진 총장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정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다만 제자들을 지도할 때만큼은 엄했다. 피아노 소리만큼 큰 소리를 내며 학생들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생전 김 전 교수의 연구실 한쪽 벽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야샤 하이페츠(1901∼1987)의 글귀가 걸려 있었다. “하루 연습을 거르면 자신이 그 사실을 안다. 이틀이면 비평가가 안다. 사흘이 되면 청중이 알게 된다.” 지난달 15일 추도식에 걸린 추모 플래카드에는 생전 그가 자주 했던 말이 적혀 있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될 때까지.” 프로다운 모습으로 끝까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채찍질하면서도 감싸 안았던 김 전 교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문구였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 나보다 먼저 길을 걸어간 스승 혹은 선배가 내밀어준 애정 어린 손길은 든든한 버팀목이 될 때가 많다. ‘한국 바이올리니스트의 대모’라 불렸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정은 문화부 차장 kimj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