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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핵우산 명문화와 김정은의 공포

입력 | 2023-05-01 03:00:00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한미 간 ‘핵협의그룹’ 등의 내용을 담은 워싱턴 선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지난달 말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의 핵우산을 명문화한 ‘워싱턴 선언’을 가장 중요한 외교 업적으로 내세웠다. 이 선언은 미국이 동맹국의 핵 억제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 계획을 담아서 선언하고, 이를 미국 대통령이 약속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핵으로 한국을 공격하면 정권의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척에 실린 핵 자산만으로 80개의 북한 도시를 동시에 파괴할 수 있는 전략핵잠수함(SSBN)이 한반도에 빈번하게 전개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번 워싱턴 선언은 과거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예전에도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보호 아래에 있긴 했지만 이번엔 미국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한국이 핵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이 대응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변신한 세계적인 성공 사례인 한국이 핵무기에 속절없이 무너지는데 미국 대통령이 약속을 저버린다면 초강대국 미국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세계의 핵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는 핵 개발에 매달리게 될 것이고, 직접 만들지 못한다면 암시장에서 사오기라도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구에 핵무기가 광범위하게 퍼지면 가장 위기를 맞을 국가는 적이 제일 많은 미국이나 중국 등 핵 보유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번 선언이 김정은에게 실제로 얼마나 공포감을 줄까를 따져봐야 한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한미 양국의 핵우산 명문화나 우리의 핵 보유가 김정은의 핵 개발을 멈추게 할지는 미지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민주 국가와 독재 국가의 차이 때문이다. 민주 국가는 대통령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책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국민에게 투표로 심판을 받게 된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그곳은 김정은 하나만을 위해 존재한다. 북한 땅에 핵무기가 80기가 아닌, 8만 기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김정은을 심판하지 못한다. 북한군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군대가 아닌 김정은의 집안만 지키는 가병이다.

북한이 핵 개발에 대한 김정일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발언이라고 선전하는 것이 “조선이 없는 지구는 없다”이다. 그런데 그 조선이 북한 인민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량 아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눈 깜짝하지 않고, 국경을 꽁꽁 막고 처형과 연좌제로 온 강토를 수용소처럼 운영하는 것이 북한 지도부다. 그들에게 조선은 김씨 일가만을 의미하며, 인민은 노예에 불과하다. 그래서 북한의 구호는 온통 ‘수령결사옹위정신’ ‘자폭정신’ ‘육탄정신’ ‘총폭탄정신’과 같은 섬뜩한 말로 도배돼 있다. 한마디로 김씨 일가를 위해 너희들은 목숨 따윈 서슴없이 내놓으란 뜻이다.

이런 북한에 가장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는 말은 “북한이 종말을 맞게 될 것”이 아니라 “핵 장난을 치면 김정은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경고이다. 북한은 ‘핵에는 핵’이라는 ‘공포의 균형’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오히려 김정은의 공포는 스텔스기에서 투하한 스마트 폭탄 한 발이나, 내부에서 쏘는 한 발의 저격용 탄알에서 극대화된다.

따라서 북한의 핵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던지는 메시지는 좀 더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북한을 지도상에서 지운다거나 석기 시대로 돌리겠다는 말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북한 수뇌부를 제거할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김정은에겐 수십 척의 핵잠수함이 오는 것보다, 근거리 휴대용 미사일을 가진 몇 개의 반체제 그룹이 북한 내에 존재하는 것이 더 위협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김정은의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목숨이 강대국의 저울대에 오르는 일일 것이다. 북한을 상대로는 그런 위협을 극대화해야만 진정한 공포의 균형이 만들어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