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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부추긴 ‘관대한 전세대출’ [오늘과 내일/김유영]

입력 | 2023-05-01 21:30:00

세입자 보호 명목으로 규제의 무풍지대
집값까지 밀어 올려… 연착륙 유도해야



김유영 산업2부장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한다. 전세 사는 사람들은 ‘(집주인이 아닌) 은행에 월세 낸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만큼 전세자금 대출이 일반화됐다는 뜻이다. 이전 정부 때에도 주택담보대출부터 신용대출까지 조이면서도 전세대출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가 없어 소득이 적어도, 다른 대출이 있어도 전세대출은 나왔다. ‘세입자 주거 안정’이라는 명목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세입자를 위한 ‘관대한 전세대출’이 세입자를 보호했는지를 돌이켜 보면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다. 서울 강서구와 인천 미추홀구 등 전세사기에서 전세대출은 필연처럼 등장한다. 공인중개사든 집주인이든 세입자에게 전세대출을 권한다. 전세금의 최대 90%까지 대출된다. 전세금의 10%만 내면 입주하는, 혹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전세대출의) 이자 지원금을 준다’고 꼬드기기도 한다.

문제는 임대차법 시행으로 전셋값이 치솟으면서 벌어졌다. 아파트 전세를 감당키 어려운 사람들은 빌라나 오피스텔 전세를 구했는데, 시장에서 소외된 주택 유형이어서 전세가가 매매가의 80∼90%를 웃도는 ‘깡통전세’가 적지 않았다. 집주인이 작정하면 수천 채의 빌라를 사들일 수 있는 구조다. 세입자가 전세대출로 받은 전세금을, 집주인은 매매대금으로 치렀다.

외환위기 때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깡통전세가 있었지만 당시엔 매매가가 떨어졌지 전세 수요는 높아 전세가가 높았다. 하지만 최근처럼 전세가가 매매가보다 가파르게 떨어지면 집주인은 지급 불능에 이른다. 2년 전 비싸게 전세시장에 진입한 세입자들이 대거 그 피해를 떠안고 있다. 전세대출이 전세사기 땔감으로 쓰인 것이다.

전세대출은 집값 상승기에 아파트 등 갭투자 수요와 맞물려 집값을 밀어 올리기도 했다. 전세대출이 잘 나와 세입자는 치솟은 전세가를 감당할 수 있게 됐고 ‘비싼 전세 구하느니, 내 집 마련하겠다’는 수요가 생기며 매매가가 다시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저금리 시대엔 전세대출을 받은 뒤 여유 자금으로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세대출이 세입자 주거 안정에 기여했다는 순기능을 무시할 순 없지만, 최근 5년 새 비정상적으로 폭증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권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지난해 10월 말 기준 171조 원으로 전체 가계부채의 20%에 육박한다. 2017년 말(48조 원)보다 3배 넘게 늘었다.

전세가 급등기에 전세대출 수요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급등한 기현상이 나타난 건 은행과 정부의 합작품으로 봐야 한다. 은행 전세대출은 한국주택금융공사나 주택도시보증공사 등 보증기관이 보증 서주는 것이어서 세입자가 전세대출을 못 갚으면 보증기관에서 대신 갚아준다. 은행은 ‘땅 짚고 헤엄치는’ 이자 장사를 했다. 정부도 전셋값이 급등하는 와중에 전세대출까지 줄일 수 없었기에 전세대출의 부작용은 묵인한 것으로 짐작한다.

전세대출은 집 사고 싶은데 자기 돈은 없는 집주인도, 목돈이 없는 세입자도 만족시켰다. 하지만 전세사기단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재료로 쓰였고 매매시장에선 집값을 끌어올리며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을 더 어렵게 했다. 지금이라도 전세대출 축소의 연착륙을 안 하면 주택 자산 거품은 언제라도 생길 수 있다. 전세대출을 갑자기 줄일 수도 없겠지만 점진적으로 전세대출 보증 등을 줄이는 방법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고금리로 전세대출 선호도가 낮아지고 전세가도 떨어지는 지금이 전세대출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적기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