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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심장 전문의가 무좀 치료… 동네의원 28%, 전공과 다른 ‘간판’

입력 | 2023-05-02 03:00:00

[동네의원, 전공과 다른 진료]
전공분야 수가 낮아 ‘부업’ 치중




울산의 한 아파트 상가 건물에는 티눈 제거 시술로 유명한 동네의원이 있다. 이곳 원장 A 씨는 대학병원 수술실을 8년간 지키며 수많은 심장병 환자를 살려낸 흉부외과 전문의였다. 그는 밤낮없는 수술과 낮은 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의원을 차린 뒤 발톱 무좀, 티눈 환자부터 고혈압, 당뇨 환자까지 과목을 가리지 않고 진료하고 있다. A 씨는 “나는 ‘흉부 외(外)’만 진료하는 흉부외과 의사”라고 자조했다.

1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3월 기준 전국 흉부외과 전문의 1154명 가운데 A 씨처럼 동네의원에서 일하면서 전공과목과 표시과목(간판)이 다른 흉부외과 전문의는 304명(26%)이었다.

외과 전문의도 사정이 비슷했다. 전국 외과 전문의(6445명) 중 1370명(21%)이 동네 의사로서 외과가 아닌 내과나 정형외과, 성형외과 등 간판을 걸고 있었다. 산부인과 전문의(6009명) 중 동네 의사 수(3173명)는 절반이 넘는다. 가까운 거리에 산부인과가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1207명(38%)이 본업과 무관한 진료를 한다.

이들 필수의료 과목을 포함한 전국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상근하는 전문의 4만5314명의 표시과목을 분석한 결과, 1만2871명(28.4%)이 원래 전공과 일치하지 않았다. 김경환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 이사장은 “생명과 직결된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들이 전공과 무관한 진료를 하는 의료 자원의 낭비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수술실 ‘탈출’해 개원한 전문의들, 수입 적은 ‘전공 본업’ 포기


동네의원 28%, 전공과 다른 ‘간판’
흉부외과 개원의 82%가 ‘다른 진료’… 인기 많은 안과 1%, 피부과 3% 그쳐
수술-치료 수가 낮아 비급여 ‘부업’… “전공과 무관한 진료는 국가적 손실”




서울의 한 의원에서 미용시술과 성형수술을 하는 의사 B 씨. 그는 피부과나 성형외과가 아닌 외과를 전공한 외과 전문의다. 4년간 전공의 수련을 마친 뒤에도 경기 지역의 한 대학병원에 남아 간암이나 담낭염 환자를 주로 수술했다. 응급수술이 많아 병원에서 쪽잠을 자기 일쑤였지만 사명감으로 버텼다. 피가 부족한 환자에게 직접 자신의 피를 수혈해 살린 적도 있다.

그런 보람이 무너진 건 2009년 어느 날이었다. 병원에서 먹고 자다가 한 달 만에 귀가하니 당시 세 살 난 첫째 아이가 B 씨의 얼굴을 못 알아보고 엄마 뒤로 숨었다. ‘이렇게 살려고 의사가 됐나….’ B 씨는 고심 끝에 대학병원을 떠났다. 그후 3년간 성형외과 병원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성형 기술을 익힌 뒤 2013년 성형 전문 의원을 차렸다. 처음엔 전공을 살려 외과의원을 차리려 했지만 동네의원에선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B 씨는 “솔직히 지금도 수술실이 그립다. 자면서도 수술로 환자를 살리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 개원의 28%, 전공과 무관한 진료

동네의원에서 일하는 전문의 10명 중 3명은 B 씨처럼 자신이 전공한 전문과목이 아닌 다른 간판(표시과목)을 내걸고 진료한다는 통계가 나왔다. 1일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3월 기준 전국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상근하는 전문의 4만5314명의 표시과목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한 결과 1만2871명(28.4%)이 원래 전공과 일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의대 졸업생들의 대표적인 ‘기피 전공’인 흉부외과는 표시과목과 일치하지 않은 비율이 81.9%로 가장 높았고, 외과(52.1%)와 산부인과(38.0%), 신경과(35%)도 불일치율이 평균보다 높았다. 반면 전공의 모집 때마다 지원자가 몰리는 안과의 경우 불일치율은 1%에 불과했다. 피부과(3.4%)와 이비인후과(4.7%), 정형외과(6%), 성형외과(6.8%)도 불일치율이 낮았다.

● 고된 수술-당직에 ‘개원’ 탈출 러시

전문의들이 짧게는 3년, 길게는 6, 7년에 이르는 수련 경력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증 환자가 몰리는 대형병원에선 응급진료와 당직이 잦아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료 과실에 따른 소송 위험도 한몫한다.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였던 C 씨는 2021년 서울 강남구에서 피부미용 의원을 열었다. 그는 10년 가까이 응급실을 지키며 논문 발표도 활발히 했지만, 잦은 밤샘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소송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개원을 결정했다. C 씨는 “응급실 의료진의 근무 여건이 점점 나빠지면서 많은 옛 동료들이 개원을 고려하고 있다. 곧 ‘탈출 러시’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필수의료’ 분야의 의사일수록 동네의원에서는 특기를 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중증 환자를 수술하려면 전문 의료진의 도움과 입원실, 고가의 수술 장비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심장이나 혈관 질환 등 고난도 수술을 주로 하는 흉부외과 전문의는 동네의원에서 수련 경험을 100% 살리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 수가 탓에 ‘부업’ 비급여 진료 치중

전문과목과 표시과목이 같다고 해서 모두 전공을 살려 진료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환자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 치료와 수술에는 건강보험 수가가 낮게 책정된 탓에 ‘부업’인 비급여 진료를 앞세우는 주객전도(主客顚倒)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 인천에서 내과의원을 운영하는 내과 전문의 D 씨가 그렇다. 종합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 등 심장질환 환자를 진료했던 경험을 살려 심장 환자를 주로 치료하려 했다. 그런데 의원을 찾는 환자 중 심장 환자는 10%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암 검진이나 내시경 환자들이었다. 대구에서 외과의원을 운영하는 외과 전문의 E 씨도 실제로는 통증주사 등 본업과 무관한 진료만 하고 있다. E 씨는 “간판에 ‘외과’라는 글자를 붙여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말했다.

길고 고된 수련을 거쳐 전문의가 된 의사들, 그중에서도 생명을 다루는 필수의료 의사들이 전공과 무관한 진료를 하는 건 국가적인 손실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신 의원은 “국가는 병원 근무환경을 개선하는 한편으로 동네의원에서는 포괄적 진료가 가능한 의사가, 병원급 이상에선 중증질환 치료가 가능한 전문의가 각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력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이문수 기자 doorwat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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