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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월대와 견마

입력 | 2023-05-03 03:00:00

월대는 중국 자금성 천안문에는 없어
조선의 궁궐에만 있는 事大의 상징
월대 만들어 말의 발목을 잡더니
이제는 복원해 시민의 발목을 잡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중국 자금성의 출입문인 천안문에는 월대가 없다. 천안문을 지나면 나오는 단문과 오문에도 없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즉위식을 하는 태화전 입구, 즉 태화문에서야 월대가 나타난다. 필요하면 태화전 입구까지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인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었다.

경복궁의 출입문인 광화문 앞에도 본래 월대가 없었다. 태화전에 해당하는 근정전의 입구, 즉 근정문에는 월대가 있었다. 세종 때 예조판서가 광화문 앞에도 월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신하들이 무엄하게 광화문 코앞까지 말을 타고 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곳인데도 문 앞에 월대가 없어 누추하다는 것이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농사철이라 백성이 바쁘다는 이유였다. 그 후 월대를 만들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만들었다면 월대 복원에 앞선 발굴 공사에서 무슨 흔적이라도 나왔을 것이다.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게 이번 발굴의 가장 큰 성과다.

광화문 앞에는 월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른 시기부터 정궁으로 쓰인 창덕궁의 출입문인 돈화문 앞에는 월대가 만들어졌다. 월대에는 말에게는 장애물인 계단이 있다. 잘못하다간 말에서 떨어질 수 있어 임금조차도 말을 타고 통과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됐다. 월대는 그 시대 대부분의 말을 보유한 왕실이 말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박제가 등 북학파가 신랄한 비판을 쏟아낸 조선의 기이한 풍습이 견마(牽馬)다. 말을 그냥 타고 가면 될 것을 사람이 말을 끌게 한다.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는 말이 있다. 군사용이 아니면 말을 점점 더 안 쓰게 돼 말 타는 기술을 잃어버리고 말도 빌려 타게 되자 견마꾼이 끄는 대로 느릿느릿 타는 게 양반들 사이에서는 플렉스(flex·과시)가 됐다.

박제가가 1778년(정조 2년) 청나라를 돌아보고 와서 쓴 ‘북학의’는 수레 얘기로 시작한다. 청나라에는 말수레가 많은 데 반해 조선에는 고조선 벽화에도 나오는 말수레가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농산물을 생산해도 빨리빨리 실어 나르지 못하니 상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상업이 발전하지 못하니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도 지지부진했다. 서양은 마차가 달리고 중국은 말이 끄는 수레로 북적일 때 조선은 소달구지나 돌아다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중국 황제가 거하는 자금성의 출입문에는 없는 월대를 조선 왕이 거하는 궁궐의 출입문에는 둬야 한다는 발상이 세종 때 예조판서의 독자적 발상인지, 중국 측에서 요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조선의 기동성을 떨어뜨렸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궁궐 출입문의 월대는 중국과 조공 관계에 있던 다른 국가에서도 보기 힘든 것으로 조선의 과잉 예(禮) 의식이 빚은 결과다.

광화문 월대는 흥선대원군이 버려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6년(고종 3년) 만들었다. 돈화문에도 월대가 있으니 광화문에도 월대를 만들었을 것이다. 역사가 깊다고도 할 수 없고, 특별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도 할 수 없는 데다 사대(事大)의 상징과도 같은 월대를 광화문 앞 사직로를 직선에서 곡선으로 만들어 시민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협하면서까지 복원하려 한다.

복원되는 월대는 고종 때와 달리 도로로 둘러싸여 월대 좌우로 부채꼴 모양의 거대한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주변 면적까지 합치면 고종 때의 약 3배다. 대한민국은 21세기 개명 천지에 조선에도 없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월대를 갖게 된다. 외국인이 ‘저것은 무슨 용도였냐’고 물으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문화재청처럼 ‘임금과 백성이 만나는 공간’이라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할 것인가. 월대는 사대 말고는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건조물이다.

발굴 공사에서 월대 계단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경사면으로 개조된 흔적이 발견됐다. 고종과 순종이 자동차를 타기 시작하면서 이미 월대는 거추장스러워졌다. 월대는 건축학적 관점에서 봐도 ‘없는 게 차라리 나은(less is more)’ 것으로 조선이 일제에 강점당하지 않았더라도 근대화 과정에서 철거됐어야 할 것이다. ‘일제가 훼손했으니 닥치고 복원’이 어디 월대뿐이겠냐마는 대한민국의 중심 도로를 차지하면서까지 복원하는 광화문 월대는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