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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영업사원’들의 들쭉날쭉 성적표[오늘과 내일/박중현]

입력 | 2023-05-03 21:30:00

박정희가 세운 ‘종합상사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영업 실력은 천차만별



박중현 논설위원


영업사원에게 필요한 기술 중 하나가 물건을 팔기 전에 고객 마음부터 얻는 것이다.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은 그런 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1세대 영어강사 오성식 씨는 “미국인들이 듣기 좋은 달콤한 말들을 밑밥으로 깔고, 그러고 나서 내 얘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탑건 매버릭’과 ‘미션 임파서블’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몰라도 BTS와 블랙핑크는 알고 계실 것”이라는 부분이 그랬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현대차 공장이 있는 텍사스, 조지아 지역구 의원들을 지목해 기립, 박수를 유도한 건 영리한 전략이었다. 한국 기업들의 막대한 대미 투자와 현지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하는 모습을 늘 지켜봐야 했던 우리 국민들의 씁쓸함을 달래면서 ‘그거, 한국이 한 거 알지’ 하고 생색을 제대로 낸 느낌이다.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임한 건 윤 대통령이 처음이다. 하지만 국가 이미지와 주력 수출품을 세일즈하는 건 모든 나라의 수장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책무다. 천연자원은 전혀 없고, 뭐라도 만들어 해외에 팔아 돈을 벌어들여야 하는 한국 같은 수출 제조업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수출을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키운 ‘세일즈 대통령’의 원조는 박정희다.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수입 대체산업 육성에 주력하던 1960년대에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뜯어말리는 수출주도형 국가를 기획하고 추진했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180여 차례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한 박 대통령은 ‘종합상사 대한민국’ 창립자로 불릴 만하다.

영업의 최고 스페셜리스트로는 이명박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그는 특히 중동 지역 영업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현지에 출장 가는 장관에게는 ‘국왕이 총애하는 몇 번째 부인, 그 부인의 몇 번째 아들을 위해 어떤 선물을 준비하라’는 식의 지시가 떨어졌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유치 등 실적도 뒤따랐다. 올해 초 윤 대통령의 중동 방문을 앞두고 이 대통령은 친분 있는 순방국에 친서를 전달하는 애프터서비스까지 했다.

영업 판로 개척이란 면에선 노태우 대통령이 발군이었다. 노 대통령은 구(舊)공산권이 붕괴하는 시기 발 빠른 ‘북방외교’로 중국·러시아와 동구권까지 해외시장의 경계를 비약적으로 넓혔다. 영업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실적도 만만찮다.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진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외교력을 집중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영업사원으로선 손방에 가까웠다. 안에서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해외에선 원전을 세일즈했다. 초짜 영업사원도 ‘우리 집은 위험해 안 쓰지만, 좋으니 한번 써보라’고 권하진 않는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된 중국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은 계속됐고, 강제징용 문제로 일본과 교역은 악화됐다. 장기 무역적자를 방치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은 김영삼 대통령도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렵다.

윤 대통령이 미국, 중동을 상대로 얻은 영업실적 대부분은 아직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지 않은 미완성이다. 게다가 지금은 미국 중심 자유진영과 중국·러시아 권위주의 블록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쪼개지는 시대다. 한쪽에서 얻은 성과가 다른 쪽의 불이익이 될 수 있다. 한 정부의 대외영업 종합 성적표는 결국 임기가 끝난 후 찬찬히 계산기를 두드려 봐야 나온다. 고객의 마음을 얻는 건 영업의 시작일 뿐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