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덕 산업1부 차장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 11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센터의 김지용 신소재사업실장(현 미래기술연구원장)의 방 한쪽 벽면은 대형 인쇄지 여러 장을 이어 붙인 로드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깨알같이 쓰여 있던 글자들을 세세히 기억하진 못한다. 다만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음극재와 양극재 사업을 어떻게 키워갈지 세부 단계별로 촘촘하게 정리해놓은 걸 보고 감탄했던 장면은 머리에 남아 있다.
김 실장은 그 로드맵을 가리키면서 ‘소재보국(素材保國)’이란 단어를 썼었다. 포스코가 조선, 자동차, 가전 등 국가 핵심산업에 안정적으로 철을 공급했던 걸 ‘제철보국(製鐵保國)’이라 부르는 것처럼 미래 신산업에 필요한 소재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소재 사업은 공격적으로 투자해도 10년은 걸린다”고 했다.
포스코가 소재 사업을 본격화한 건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8월 포스코켐텍이 LS엠트론의 이차전지 음극재사업부(옛 카보닉스)를 인수했고, 2012년 3월에는 휘닉스소재와 지분 절반씩을 투자해 양극재 전문업체 포스코ESM을 세웠다. 이들은 이후 다른 소재회사들과 합쳐져 지금의 포스코퓨처엠이 됐다.
연이은 투자는 넘쳐나는 일감을 감당해내기 위해서다. 포스코퓨처엠은 올 들어서만 삼성SDI와 40조 원(10년간), LG에너지솔루션과 30조 원(7년간)어치 소재 공급 계약을 맺었다. 양극재 누적 계약액만 92조 원에 달한다.
포스코그룹은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공정자산 기준 재계 순위에서 처음 5위에 올랐다. 소재를 철강에 이은 새로운 사업 축으로 결정하고 오랜 기간 투자해온 결과가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동차 시장의 패러다임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전기차로 옮아가면서 포스코퓨처엠은 특수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한국산 배터리, 특히 한국산 소재의 몸값을 이렇게 높여준 것도 어쩌면 행운에 가깝다. 하지만 이 모든 게 10년 전 벽면을 가득 채웠던 그 로드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국 경제 전체로 봐도 해묵은 과제가 있다. 수출 상대국으로는 중국에, 품목으로는 반도체에 지나치게 쏠린 산업구조다. 지난달까지 14개월째 이어진 무역적자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특정 국가와 상품에 대한 의존증이 기초 체력을 약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많다.
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