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덕 ‘진오비산부인과의원’ 원장
의과대학 1학년 때 처음 배우는 과목은 해부학이고, 해부학 실습은 4월과 5월에 한다. 라일락이 많이 피는 계절이다. 모교 의과대학 교정에는 라일락 나무가 많았다. 봄이면 라일락 꽃을 보면서 등교를 하고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서 하교를 했다. 해부학은 200개가 넘는 뼈의 이름을 모두 암기해야 하는 힘든 과목이라 봄을 제대로 즐길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을 괴롭힌 것은 뼈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시신의 혈관을 찾고 뼈를 바르던 손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일이 정말 괴로웠다. 해부학 실습이 주는 고통과 회의를 나는 비교적 큰 후유증 없이 넘겼지만 일부 학생들은 그런 고민을 넘어서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하기도 했다. 10% 정도의 학생들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자퇴하거나 다른 학과로 옮겨 갔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라일락 신드롬’이라고 불렀다.
이름이야 무엇으로 붙이든 라일락 신드롬은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한 번은 견디고 넘어가야 하는 숙명과도 같다. 삶에 대한 회의,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인생무상…. 그 모두를 뭉뚱그려 놓은 복잡한 감정을 이겨 내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하루하루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내야 하는 것이 의사의 삶이다. 삶은 항상 죽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둘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진실을 매번 직면해야 한다. 나는 산부인과 의사로 30년째 새 생명의 탄생을 도우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어느 날 돌연 운명의 여신이 내게서 미소를 거둘 수 있고, 그 순간 악몽이 시작되리란 사실도 안다.
심상덕 ‘진오비산부인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