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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최강’ 한지은 “프로서 가영 언니 꺾고 싶어”

입력 | 2023-05-10 03:00:00

초교 시절부터 ‘끈기’만큼은 인정
중학교 때까지 전국우승 없었지만, 고교 자퇴 뒤 국제대회 정상 올라
韓여자 3쿠션 선수론 첫 세계 2위… 내달 여자프로당구로 무대 옮겨



‘아이스걸’ 한지은이 1일 서울 성북구 PBC캐롬클럽에서 찍어치기 자세를 취하고 있다. 2022∼2023시즌 대한당구연맹(아마추어) 랭킹 1위에 오른 한지은은 2023∼2024시즌부터 여자프로당구(LPBA) 무대에서 활동한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당신 딸이 아무래도 당구 천재 같다.”

2011년 경기 성남시에서 당구장 ‘3구4구’를 운영 중이던 임상열 씨(60)는 식사 배달을 와서 자신과 내기 당구를 하고 있던 분식집 사장 한주철 씨(60)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씨를 따라온 초등학생 딸 한지은(22)에게 재미 삼아 스트로크를 알려줬는데 자세가 정말 완벽했다. 임 씨는 “레슨비를 받지 않겠다”며 한 씨를 집요하게 설득했고 1주일 만에 “딸에게 당구를 가르쳐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로부터 1주일도 안 돼 임 씨는 ‘한지은 천재설’을 철회했다. 자세를 빨리 익혔다고 당구도 빨리 배우는 건 아니었다. 임 씨는 대신 한지은에게서 또 다른 비범한 점을 발견했다. 끈기였다. 한지은은 방과 후 오후 3시경 당구장에 나와 밤 11시까지 군말 없이 연습에 열중했다. 큐에 0.5kg 모래주머니를 채운 상태로 스트로크를 반복하는 훈련만 한 달 넘게 시키기도 했지만 한지은은 불평 없이 훈련을 마쳤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큐를 잡고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전국대회 우승을 해보지 못했던 한지은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17년 “당구에 더 집중하겠다”며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자퇴 2년 뒤인 2019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버호벤 오픈 3쿠션 토너먼트에서 당시 세계 1위 테레서 클롬펜하우어르(40·네덜란드)를 꺾고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일 서울 성북구 PBC캐롬클럽에서 만난 한지은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당구에 재능이 없는가 보다. 이렇게까지 훈련했는데 어떻게 성과가 이렇게밖에 안 나오나’라며 홀로 자책하기도 했다”면서 “1년 중 생일, 설날·추석 연휴 정도만 쉬고 매일 훈련했다. 내가 생각해도 오기가 있는 것 같다. ‘당구가 재미있다’는 생각보다도 ‘일단 시작했으니 꼭 잘해내고 싶다’는 승부욕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말했다.

한지은이 꼭 물리치고 싶었던 대상은 상대 선수가 아니라 ‘어제의 한지은’이었다. 한지은은 “경기 때 상대 선수보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누구랑 치든 결국 당구는 나와의 싸움”이라면서 “당구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2021년 국토정중앙배에서 전국대회 첫 우승을 했다. 그런데 그 우승도 기쁘지 않았다. 경기에서는 이겼지만 스스로 못 쳤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회 순위보다 중요한 건 에버리지(이닝당 평균 득점)라고 생각해왔다. 에버리지가 좋다면 치열하게 싸우고 졌어도 만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지은은 이제 자타공인 한국 여자 당구 최강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한지은은 2022∼2023시즌 대한당구연맹(아마추어) 랭킹 1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9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 여자 3쿠션 선수권대회 준우승으로 세계 랭킹도 2위까지 끌어올렸다. 한국 여자 3쿠션 선수가 세계 2위에 오른 건 한지은이 처음이다.

아마추어 선수로서 이룰 건 모두 이룬 한지은은 다음 달부터 여자프로당구(LPBA)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한지은은 “아마추어 당구를 정복했으니 이제는 프로에서도 정상을 찍어보고 싶다. LPBA 첫 대회에서 가장 잘 친다는 김가영(40·하나카드) 언니를 꺾고 우승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한지은이 시즌 첫 대회인 블루원리조트 챔피언십에서 자신의 공약을 이뤄내면 LPBA에도 새로운 역사가 쓰인다. 프로 전향 후 해당 시즌 개막전에서 바로 우승한 선수는 아직 없었다.

한지은은 경기 초반 성적이 낮은 대신 후반에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스타일이다. 25∼30점까지 승부를 보는 아마추어 당구와 달리 LPBA에서는 세트당 11점밖에 되지 않아 이런 스타일이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한지은은 “초반부터 잘 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스트로크 연습을 수십 번 미리 하고 들어가는 등 몸을 빨리 푸는 루틴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 “오랜 기다림 끝에 전국대회 첫 우승을 했을 때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나를 도와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이후로 ‘난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되새기는 게 습관이 됐다. 프로에서도 이런 내 자신감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며 미소지었다.

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