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 시절부터 ‘끈기’만큼은 인정 중학교 때까지 전국우승 없었지만, 고교 자퇴 뒤 국제대회 정상 올라 韓여자 3쿠션 선수론 첫 세계 2위… 내달 여자프로당구로 무대 옮겨
‘아이스걸’ 한지은이 1일 서울 성북구 PBC캐롬클럽에서 찍어치기 자세를 취하고 있다. 2022∼2023시즌 대한당구연맹(아마추어) 랭킹 1위에 오른 한지은은 2023∼2024시즌부터 여자프로당구(LPBA) 무대에서 활동한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당신 딸이 아무래도 당구 천재 같다.”
2011년 경기 성남시에서 당구장 ‘3구4구’를 운영 중이던 임상열 씨(60)는 식사 배달을 와서 자신과 내기 당구를 하고 있던 분식집 사장 한주철 씨(60)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씨를 따라온 초등학생 딸 한지은(22)에게 재미 삼아 스트로크를 알려줬는데 자세가 정말 완벽했다. 임 씨는 “레슨비를 받지 않겠다”며 한 씨를 집요하게 설득했고 1주일 만에 “딸에게 당구를 가르쳐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로부터 1주일도 안 돼 임 씨는 ‘한지은 천재설’을 철회했다. 자세를 빨리 익혔다고 당구도 빨리 배우는 건 아니었다. 임 씨는 대신 한지은에게서 또 다른 비범한 점을 발견했다. 끈기였다. 한지은은 방과 후 오후 3시경 당구장에 나와 밤 11시까지 군말 없이 연습에 열중했다. 큐에 0.5kg 모래주머니를 채운 상태로 스트로크를 반복하는 훈련만 한 달 넘게 시키기도 했지만 한지은은 불평 없이 훈련을 마쳤다.
1일 서울 성북구 PBC캐롬클럽에서 만난 한지은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당구에 재능이 없는가 보다. 이렇게까지 훈련했는데 어떻게 성과가 이렇게밖에 안 나오나’라며 홀로 자책하기도 했다”면서 “1년 중 생일, 설날·추석 연휴 정도만 쉬고 매일 훈련했다. 내가 생각해도 오기가 있는 것 같다. ‘당구가 재미있다’는 생각보다도 ‘일단 시작했으니 꼭 잘해내고 싶다’는 승부욕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말했다.
한지은이 꼭 물리치고 싶었던 대상은 상대 선수가 아니라 ‘어제의 한지은’이었다. 한지은은 “경기 때 상대 선수보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누구랑 치든 결국 당구는 나와의 싸움”이라면서 “당구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2021년 국토정중앙배에서 전국대회 첫 우승을 했다. 그런데 그 우승도 기쁘지 않았다. 경기에서는 이겼지만 스스로 못 쳤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회 순위보다 중요한 건 에버리지(이닝당 평균 득점)라고 생각해왔다. 에버리지가 좋다면 치열하게 싸우고 졌어도 만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지은은 이제 자타공인 한국 여자 당구 최강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한지은은 2022∼2023시즌 대한당구연맹(아마추어) 랭킹 1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9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 여자 3쿠션 선수권대회 준우승으로 세계 랭킹도 2위까지 끌어올렸다. 한국 여자 3쿠션 선수가 세계 2위에 오른 건 한지은이 처음이다.
아마추어 선수로서 이룰 건 모두 이룬 한지은은 다음 달부터 여자프로당구(LPBA)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한지은은 “아마추어 당구를 정복했으니 이제는 프로에서도 정상을 찍어보고 싶다. LPBA 첫 대회에서 가장 잘 친다는 김가영(40·하나카드) 언니를 꺾고 우승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한지은이 시즌 첫 대회인 블루원리조트 챔피언십에서 자신의 공약을 이뤄내면 LPBA에도 새로운 역사가 쓰인다. 프로 전향 후 해당 시즌 개막전에서 바로 우승한 선수는 아직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 “오랜 기다림 끝에 전국대회 첫 우승을 했을 때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나를 도와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이후로 ‘난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되새기는 게 습관이 됐다. 프로에서도 이런 내 자신감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며 미소지었다.
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