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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서 등잔 1712점 무더기 출토…어두운 마음과 세상 밝히길 기원했을까

입력 | 2023-05-10 11:31:00


경북 경주 황룡사터 서회랑 서편지구에서 출토된 등잔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등잔이 한꺼번에 1700여 점이 출토된 건 처음”이라고 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저는 가난하여 공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등불 하나를 올려 부처님의 크신 덕을 기립니다.”

가난한 인도 여인 난타는 온종일 구걸해 얻은 한 푼을 등불 하나 밝히는 데 썼다. 그의 등불 주변에는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불이 가득했지만 거센 바람이 불었을 때 오직 난타의 등불만 살아 어둠을 밝혔다. 주위에서 난타의 등을 끄려 할수록 불은 더 밝게 타올랐다. 이를 바라보던 부처는 “가난하지만 큰 마음을 지닌 여인이 정성으로 켠 등불이기에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불경 ‘현우경(賢愚經)’ 속 이야기로 연등(燃燈) 의례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한국에서 연등 의례는 불국토를 꿈꿨던 신라의 왕실사찰 황룡사에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경북 경주 황룡사터 서회랑 서편지구에서 출토된 등잔 8점. 해당 등잔들을 토기로 제작됐으며 지름은 약 10㎝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1일 발표 예정인 ‘황룡사지 회랑 외곽 공간에 대한 최신 조사 성과’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최근까지 경북 경주 황룡사의 서회랑(西回廊) 서편지구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등잔 1712점이 무더기로 출토된 것으로 나타났다.

황룡사 내 유일한 연지(蓮池)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약 30m 떨어진 곳에서 가로 240㎝, 세로 220㎝, 깊이 90㎝ 규모 구덩이가 나왔는데, 이 속에서 역대 최대 수량의 등잔이 쏟아져 나온 것. 경주 분황사(130여 점), 안압지(150여 점) 등에서도 등잔이 나왔지만 1000점이 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화려하지 않은 지름 약 10㎝ 크기 토제등잔에 신라인들은 어떤 염원을 담아 불을 밝혔을까. 타오르는 등불을 바라보며 어두운 마음과 세상을 밝히길 기원했을까.



조선 말기 실학자 석정 이정직(1841~1910)이 전북 전주 진북사에서 열린 연등회 풍경을 그린 ‘진북사관등(鎭北寺觀燈)’. 그림에는 남녀노소가 진북사를 찾아 등을 밝히고 등불을 바라보는 모습이 담겼다. 불교중앙박물관 제공

최문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수량 면에서 대규모 행사나 의례가 황룡사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등잔들은 특정 시기 한꺼번에 매장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연지를 중심으로 이뤄진 의례의 마무리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등잔에 불을 밝히는 것은 물론 한꺼번에 매장하는 행위까지 의례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문헌을 통해 이 등잔들이 황룡사에서 행해진 ‘연등회’나 ‘백고좌(百高座)’에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 경문왕이 866년 정월 황룡사에 행차해 연등 행사를 구경하고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돼 있다. 100개의 사자좌(獅子座, 부처를 모시는 자리)를 마련해 법사 100명이 100일 간 설법하는 백고좌 역시 613년 원광법사가 황룡사에서 설법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후에도 황룡사에서 10번의 백고좌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사료를 통해 전해진다.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는 “백고좌 때 법사들이 가부좌한 자리를 밝히는 데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수량에 미뤄 백고좌보다는 대규모 연등회에 쓰였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황룡사 서회랑 서편지구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토대로 이 공간이 의례를 행하고 지원하는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란 추측을 내놨다. 앞서 2020년 서편지구 건물지 1호 주변에서는 사찰 내 의례에 사용하는 중요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추정되는 6㎝ 크기 ‘금동봉황장식자물쇠’ 1점이 나왔다. 2021년 서편지구 건물지 79호 주변에서도 등잔 100여 점이 출토된 바 있다. 553년 창건된 황룡사는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돼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