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8일 앞둔 6일(현지 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 시가지에 내걸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선거 광고판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는 20년 동안 집권해 온 에르도안 대통령의 교체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이스탄불=강성휘 특파원 yolo@donga.com
강성휘 카이로 특파원
《“이번 대선 결과는 정말 다를 것이다. 드디어 튀르키예(터키)에도 희망이 보인다.”
대선을 8일 남겨둔 6일(현지 시간) 튀르키예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만난 대학생 괵첸 카나 씨(20)는 대선 전망을 묻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라를 이끄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함께 있던 실라 괴네스 씨(19)도 “새로운 튀르키예를 만들 때가 왔다. 생애 첫 투표권을 이런 의미 있는 선거에서 행사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집권 20년, 수세 몰린 에르도안
대선 승리로 30년 장기 집권 발판을 만들겠다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그의 독주를 저지하겠다는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의 승부는 14일 대선 결과가 좌우한다. 1위 후보가 득표율 50%를 넘기지 못할 경우 28일 1, 2위 후보 간 결선투표가 진행된다.
튀르키예 여론조사 신뢰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된 후 실시된 50여 차례 여론조사에서 30번가량 에르도안 대통령에 앞선 것을 감안하면 박빙 속 상승세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 이후 튀르키예 유권자 양극화가 뚜렷해졌지만 이번 대선만큼 그가 경쟁자로부터 압박을 받은 선거는 없었다”고 분석했다.
‘살인적 물가’ 경제가 최대 이슈
이스탄불 최대 전통시장 ‘이집션 바자’에서 10년째 셔츠 상점을 하는 케말 알리 씨(45)는 “갈수록 적자만 늘어가고 있다”면서 “에르도안에게 질려 버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알리 씨는 “지난 대선에서는 에르도안에게 속았지만 이번에는 속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에르도안 대통령이 수세에 몰린 배경에는 살인적 물가상승률로 대표되는 역대급 경제위기가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튀르키예 물가상승률은 43.7%였다. BBC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제 추세와는 반대로 금리 인상을 거부해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고 있다”며 “공식 물가상승률은 50% 수준이지만 학자들은 실제 물가상승률이 100%를 넘는다고 본다”고 전했다.
20년 장기 집권에 대한 비판과 민주주의 열망 역시 이번 대선 화두로 꼽힌다. 로이터는 처음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는 약 600만 유권자 표심이 선거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대부분 에르도안이 아닌 다른 대통령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변화 열망이 커서 야당 지지 성향을 갖고 있다고 로이터는 분석했다. 7일 이스탄불대 인근에서 만난 제이닙 외즈티 씨(20)는 “에르도안이 집권한 지난 20년간 자유는 억압받았고 젊은 세대를 위한 공약(정책)도 전무하다시피 했다”며 “이번에도 그가 당선된다면 외국으로 취업하러 떠나거나 유학 가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2월 튀르키예 대지진 여파도 집권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BBC는 “5만 명 넘는 목숨을 앗아간 대지진과 그에 따른 경제적 여파가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던 에르도안 지위를 더욱 취약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에르도안, 불복 선언할 수도”
여전히 건재한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그의 승리가 필요하다고 힘줘 말하고 있다.술탄아흐메트 모스크 근처에서 만난 관광객 파티 술탄아흐메트 씨(45)는 “에르도안 대통령 덕에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튀르키예가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 등 국제적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스탄불 시내에서 전구 가게를 하는 제릴 투살 씨(31)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겨냥한 대지진 책임론에 대해 “그 정도 지진이라면 지구상 어떤 나라도 미리 알고 대응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라며 “에르도안 대통령이 계속 자리를 지켜야 그가 약속한 지진 피해 지역 복구 계획들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박빙 승부가 예상되는 가운데 에르도안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선거 결과에 불복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미국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에르도안이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결과를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2019년 이스탄불과 앙카라 시장 선거 당시 집권당 정의개발당 후보들이 패배했지만 이에 불복해 재투표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직장인 이스마일 크드므즈 씨(48)는 “튀르키예에도 정권교체라는 새로운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란 희망이 있다”면서도 “군과 경찰을 장악한 에르도안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만은 않을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정말이지 불안한 희망이다”라고 말했다.
―이스탄불에서
강성휘 카이로 특파원 yol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