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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제사 주재자, 장남 아니어도 된다…나이 순으로”

입력 | 2023-05-11 20:06:00


서울 서초구 대법원. 뉴스1

상속인들 사이에 별도의 합의가 없다면 사망한 부모의 유해와 묘지, 족보의 소유권 및 제사를 지낼 권리는 성별을 불문하고 자녀 중 최연장자에게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장남의 우선권을 인정한 기존 대법원 판례를 15년 만에 바꿔 장녀도 우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A 씨의 유족 간에 벌어진 유해인도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남성 상속인과 여성 상속인을 차별할 합리적 이유가 없다”며 “상속인 간의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연장자가 제사 주재자의 지위를 갖는다”고 판결했다. 고인의 유해와 묘지 등 제사용 재산의 소유권은 민법상 제사 주재자에게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8년 “상속인 사이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장남·장손자가 되고, 아들이 없는 경우 장녀가 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당시 판결에 대해 11일 대법원은 “현대 사회의 제사에서 남성 중심의 가계 계승 의미가 퇴색하고 고인에 대한 경애와 추모의 의미가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의 판례는 더 이상 조리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워 유지될 수 없다”고 했다.

이날 대법원 판결이 나온 유해인도소송은 2017년 남성 A 씨가 사망한 이후 시작됐다. A 씨는 1993년 결혼해 2명의 딸을 뒀는데,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2006년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A 씨가 사망하자 혼외자의 생모 B 씨는 A 씨 배우자 및 딸들과의 협의 없이 고인의 유해를 경기 파주시의 추모공원 납골당에 봉안했다.

배우자와 딸들은 이에 “유해를 돌려달라”며 B 씨와 추모공원 측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하지만 1, 2심 법원은 이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족 간 합의가 없는 경우 장남이나 장손자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는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례에 따라 A 씨 아들에게 유해의 소유권이 있다고 본 것이다.



● 대법 “장남 우선 판례, 지금 사회엔 부적합”
하지만 1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기존 판례가 “현대적 의미의 전통에 부합하지않는다”며 장녀 역시 사망한 부모의 유해와 묘지, 족보 등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오늘날 조상 추모 및 부모 부양에서 아들과 딸의 역할 차이가 없으며 남성 상속인 우선이 보존할 전통도 아니다”라며 판단의 이유를 설명했다. 또 “장남이나 장손자 등 남성 상속인을 우선하는 것은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헌법 11조, 개인 존엄과 양성평등에 기초한 혼인 및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헌법 36조 정신에 합치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날 대법관 9명 전원이 2008년 판례를 변경하는 것에 동의했다. 다만 4명은 협의가 없는 경우 개별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해 법원이 결정하게 해야 한다거나, 자녀 뿐 아니라 배우자에게도 유해와 묘지, 족보의 소유권 등을 줘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다만 법적·사회적 안전성을 감안해 이번 결정은 11일 이후 제사용 재산의 승계가 이뤄지는 경우에만 적용하기로 했다. 또 토지나 주택 등 다른 자산에 대한 상속은 기존 상속법상의 순위를 따르면 된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남성 중심의 가계계승을 중시한 적장자 우선의 관념에서 벗어나 헌법상 개인의 존엄 및 양성평등 이념과 변화된 보편적 법의식에 합치하는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 법조계·학계 “성평등 흐름에 적합한 판결” 
이날 판결을 두고 법조계와 학계 등에선 환영한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관습적으로 장남에게 제사를 주재할 우선권을 줬던 것이 차별이라고 판단한 법원 결정을 크게 환영한다”며 “성 인식 변화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변화한 제사의 의미까지 받아들인 역사적 판결”이라고 말했다. 여성변호사회 김영미 공보이사도 “제사 주재자를 찾기 위해 남아를 선호하던 사회 흐름이 크게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남성의 우선권을 인정했던 2008년 판결은 시대에 역행했던 것”이라며 “성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흐름에 적합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판결은 자녀 사이에 분쟁이 벌어진 경우 우선권을 판단한 것으로 부모의 유해를 어디로 모실지, 제사를 누가 주재할지 등에 대해 자녀들이 합의할 경우 합의가 우선한다. 당장 올 추석 때부터 모든 가정이 제사 주재자를 바꿀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제사와 같은 제도가 유지되려면 가족 각 구성원이 합리적이라고 느끼면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번 판결은 변화하는 사회 흐름에 법 제도 역시 발맞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유채연 기자 ycy@donga.com
장하얀 기자 jwhit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