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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삽화, 패션… 프랑스 거장 뒤피의 유쾌한 변주 [오늘과 내일/손효림]

입력 | 2023-05-11 21:30:00

유화 석판화, 시집용 목판화, 옷 직물 패턴 제작
業핵심 파악해 응용 가능한 분야로 활동 확대



손효림 문화부장


파도가 일렁이는 청명한 바다 위에 여유롭게 떠 있는 배들을 그린 유화, 리라를 들고 숲을 거니는 오르페우스를 새긴 목판화 삽화, 오렌지색 바탕에 투우사를 작게 그려 넣은 원피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1877∼1953)의 작품들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뒤피의 국내 첫 회고전 ‘라울 뒤피: 색채의 선율’은 다채로운 장르의 작품 180여 점을 통해 자유로움과 유쾌함을 선사한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바다를 보며 음악과 함께 성장했다. 경리 일을 하며 성가대 지휘자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쏟았다. 뒤피의 회화가 지닌 경쾌함과 따스함의 씨앗은 이런 환경에서 심어졌으리라. 뒤피는 195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거장 반열에 오른다.

전시 작품들은 구체적인 정보를 알면 좀 더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지만 그냥 편하게 보기만 해도 좋다. 부드러운 곡선에 맑게 채색한 아틀리에, 바닷가, 물고기 그림은 마음을 툭 내려놓게 만든다. 꽉 짜여진 틀에 맞춰 달리느라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이에게 긴장을 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기(電氣)의 역사와 영향을 그린 대형 벽화 ‘전기의 요정’을 석판화로 만든 동명 작품은 토머스 에디슨, 그레이엄 벨 같은 역사적 인물부터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까지, 친숙한 이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뒤피가 특히 사랑했던 파란색은 많은 작품에서 농담을 달리하며 시원하게 담겼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의 ‘동물시집’에 실린 목판화를 비롯해 여러 책에 삽화로 담긴 뒤피의 석판화도 볼 수 있다. 삽화를 본 유명 패션디자이너 폴 푸아레(1879∼1944)의 제안으로 뒤피는 직물 패턴을 디자인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가 디자인한 직물은 옷, 가구, 벽걸이용 천 등에 사용됐다. 뒤피의 패턴으로 만든 원피스 17점을 비롯해 그가 누이에게 선물한 검붉은 장미와 초록색 잎이 큼지막하게 어우러진 원피스는 지금 바로 입고 다녀도 눈길을 끌 정도로 세련됐다. 흰색과 검은색 꽃무늬가 가득한 소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점 가벼워지는 기분으로 전시장을 거닐며 확인할 수 있었다. 회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피는 업(業)의 본질에 집중하면서 다른 분야로 활동 반경을 차츰 확대해 나갔다는 것을. 그는 ‘시각적 표현’이라는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장르로 변주를 해나갔기에 해당 분야에서도 돋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이 모두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직물 패턴 디자인을 제안받은 뒤피는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재정적인 압박을 겪다 결국 이를 수락한다. 이후 작업을 하며 직물 디자인의 매력에 빠졌다. 업의 핵심을 파악하고 이를 응용하며 보폭을 조금씩 넓힐 것. 그의 여러 장르 작품들이 전하는 또 다른 메시지 같았다.

삶에 대한 그의 태도는 놀랍다. 뒤피는 말했다.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 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 지었다.”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짐작하기조차 아득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고 또 이렇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았을 그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기쁨의 화가’로 불리는 뒤피의 작품들이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건 이런 그의 마음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