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흔적 찾기〈2〉 계엄군 물품 기증한 홍흥준 씨 군인들 폭행 목격하고 시민군 가담 “5·18이 국민 화합 계기 됐으면…”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는 홍흥준 씨 등 시민들이 기증한 공수부대 군복, 대검, 헬기 사격 탄피 등이 전시돼 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광주 서구 쌍촌동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는 5·18민주화운동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 눈에 띄는 전시물이 있다. 5·18 당시 공수부대원이 입었던 군복과 그들이 사용했던 대검이다. 시민들이 당시 계엄군의 물품을 습득해 보관해 오다 5·18기념재단에 기증한 것들이다. 한영우 5·18기념재단 기록연구사는 “5·18 당시 물품은 ‘민주, 인권, 희생’의 5월 정신을 되새기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홍흥준 씨가 지난해 5월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개최된 5·18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행사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독자 제공
1980년 당시 광주 한 대학 관광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홍 씨는 5월 18일 오후 4시경 광주 동구 대인동 공용버스터미널 인근에서 7공수부대 1개 소대와 학생들이 대치하는 현장에 있었다. 그는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을 보고 시민군이 됐다. 그는 “당시 불교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하려 광주 북구 매곡동 절에 다녀오다 계엄군이 진압봉으로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말했다.
홍 씨는 금남로 광주은행 본점 앞 도로에 세워진 트럭에서 동료 시민군에게 카빈 소총을 나눠주던 중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탕’ 소리가 들렸고 주변 흙더미에서 먼지가 일었다. 두 번째 ‘탕’ 소리와 함께 얼굴 옆으로 뭔가 스쳐 갔고 뒤편에 있던 동료 시민군이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고 거꾸러졌다. 이날 금남로에서는 시민 수십 명이 숨졌다.
홍 씨는 이후 목숨을 건 항쟁을 이어갔다. 계엄군이 21일 오후 3시경 옛 전남도청에서 물러나자 홍 씨는 시민군 특수기동대원으로 활동했다. 22일 전남도청 풀밭에 버려져 있던 공수부대 군복을 발견했다. 며칠째 귀가하지 못한 데다 밤에 추위를 느껴 군복을 입고 다녔다.
낮에는 24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광주 동구 지원동, 서구 농성동 돌고개, 남구 백운동, 북구 문흥동 등 외곽을 순찰했다. 밤에는 금남로5가 3층 건물에서 경계를 선 뒤 여관에서 잠을 잤다. 26일 오후 7시경 5·18 사망자 4명의 시신이 안치된 전남도청 민원실을 지키며 저녁 식사로 누룽지를 먹다 묘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날 오후 11시 카빈 소총을 반납하고 전남도청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인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 작전으로 전남도청 등 광주 시내에서 시민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홍 씨는 1981년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7년 동안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1989년 서울의 한 호텔에 취직했다. 32년 동안 근무하면서 연회 서비스 지배인을 지내기도 했다. 주요 20개국(G20), 아시아-유럽, 핵안보 정상회의를 비롯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등 해외 국빈 만찬 행사 등을 치렀다.
그는 5·18단체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끔 악몽을 꾸는 등 평생 마음의 짐이 5월 트라우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광주트라우마센터는 5·18 유가족, 부상자 등 국가폭력 피해자 1090명의 치료를 맡고 있다.
홍 씨는 “5·18 당시 옛 전남도청에서 습득한 공수부대 군복이 역사 기록이라고 생각해 소중하게 보관했다”며 “당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사죄를 하고 진보, 보수를 떠나 5·18이 국민 화합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