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 ‘사건의 지평선'의 뮤즈가 된 남자’, 궤도
‘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어? 지박령이다. 어떻게 지평좌표계로 고정하셨죠?”
인터넷 ‘좀’ 하는 사람치고 이 밈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귀신이 지박령이 되려면 초속 29.76km로 움직여야 하고, 명확하게 좌표계를 찍어야 하는 고난이도의 작업을 수행 중이기에 지박령을 만나면 놀랄 게 아니라 지평좌표계 고정 노하우부터 캐내야 한다는 것.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보통의 사람이라면 떠올릴 생각이 아니다. ‘보통’이 아닌 과학에 미친 자, ‘궤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 12년째 활동해오고 있는 궤도는 과학 하나로 5시간은 기본, 10시간 내내 이야기를 꺼내는 ‘궤인(궤도+괴인)’이다. 과학은 재미없다. 분명 그래왔다. 그런데 궤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분명 하나부터 열까지 ‘과학’ 이야기인데 재미있다. 생방송 채팅창에는 ‘더 해달라’, ‘본때(?)를 보여달라’며 열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소수의 과학 덕후들의 호응일까? 궤도가 약, 공진, 항성(모두 가명)과 함께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의 구독자는 78만 명을 돌파했고 15분 동안 양자역학 이야기만 하는 콘텐츠 ‘양자역학 한 방 정리’는 조회 수 383만 회를 기록했다. 구독자 213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 ‘침착맨’에서 시행한 ‘2021 침투부 어워즈’에서 궤도는 ‘올해의 인물’, ‘올해의 콘텐츠’ 부문 및 대상 등 3관왕을 수상했다. 참고로 침착맨은 2030 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유우머 채널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 남자에 대해선 과학 외에는 모든 게 비밀이다. 본인의 이력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본명도 알려져 있지 않다. 본인은 과학을 전하는 매개체일 뿐이라며 ‘나를 알리지 마라’는 철저한 투쟁 중인 궤도. 국내 1세대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 불모지를 개척해가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과알못? 오히려 좋아
0명.궤도가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 처음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 날, 시청자 수는 처참했다. 첫날뿐만이 아니었다. 밤을 새워서 콘텐츠를 준비해도 도통 시청자 수가 늘지 않았다. 결국 SNS 등을 포함해 여러 시도 끝에 채널을 직접 운영하는 것을 포기하고 강연을 다니거나 지인 채널에서 특강 형식으로 방송을 하기도 여러 번. 다행히 인터넷 방송 플랫폼 ‘아프리카 TV’ 관계자가 시청자보다 먼저 궤도를 발견해냈다. 게임, 먹방 등이 주를 이루던 아프리카 TV에 교양을 더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궤도에게 과학 방송을 해보자고 제안한 것.
2015년 3월 과학방송 채널 ‘곽방TV’가 시작된 배경이다. 공식 방송인 만큼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졌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밈과 짤을 적절히 섞어 가며 재치 있게 풀어내는 궤도의 입담에 시청자 수는 늘어갔다. 높은 인기 덕에 해당 방송은 5년 동안 이어졌다. 2017년 10월부터 3년 간 팟캐스트 플랫폼 ‘팟빵’에서 '과학으로 장난치는 게 창피해? 과장창!'도 진행했다.
궤도는 2029년 4월 소행성 ‘아포피스’와 지구 사이 거리가 3만 1000km까지 가까워지는 것을 두고 ‘코딱지’로 비유했다. 출처 : 디스커버리 채널 코리아
언뜻 아프리카TV와 팟빵은 과학을 주제로 소통하기에 적합한 채널이 아닌 듯 보인다. 이에 대해 궤도는 과학을 ‘증오하는’ 성인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과학을 좋아하지만 중·고등학교라는 ‘데스밸리’를 지나며 과학을 혐오하게 된다”며 “시험 성적이 낮게 나오면 과학을 즐겨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 낙인 찍히기 때문이다”고 안타까워했다. “영화도 시험을 치기 시작하면 대중이 지금처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면 과학 시간은 대다수가 손꼽아 기다렸다. 화석 모형을 만들거나 부레옥잠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등의 실험 과정은 신기하고 재미 있어서다.
궤도는 이 지점에 주목했다. 그는 “성인이 돼서도 과학을 놀이로 즐길 수 있도록 문화로 만들어가야 한다”며 “음악을 듣고 영화와 뮤지컬을 보듯이 과학 강연과 콘텐츠를 즐기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실제로 그는 술자리에서도 과학 이야기를 안주 삼는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궤도는 과학이 단순히 유희의 대상이 되기에는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과학을 제대로 알려면 수식이나 방정식 등도 잘 알아야 하는데 대중이 전문가 수준의 이해도를 보유하는 것은 불가능해서다. 그래서 그는 과학 그 자체보다는 과학의 경이로움을 전하고자 한다. 과학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 녹아 있는 친숙한 것이라고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과학 대중화가 출발한다고 판단해서다.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찍은 우주 사진이 ‘예쁘다’는 이유로 휴대폰 배경화면을 하는 것만으로도 과학문화를 경험하는 시작으로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도저히 ‘안 될’ 과학? 어떻게든 잘 될 과학
궤도는 국내 1세대 과학 커뮤니케이터지만 유튜브는 비교적 늦게 시작한 편이다. 이전에는 오프라인 강연과 인터넷 방송 플랫폼을 통해서만 주로 활동해 왔다. 그는 2018년 5월 다른 과학 커뮤니케이터들과 합심해 과학 채널 ‘안될과학’을 개설했다. 당시만 해도 성공한 과학 유튜버가 드물었기에 선배들로서 좋은 본보기를 만들어 보자는 야심 찬 포부로 시작했다.현재 구독자 80만 명 이상의 ‘안될과학’ 유튜브 채널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채널을 개설하고 5개월 동안 구독자가 300명 수준에 머물렀다. 그마저도 새로운 구독자가 아니라 이전 방송부터 팬을 자처해온 이들이었다. 300명에서 301명으로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오프라인 강연을 가는 날이면 청중들에게 구독을 부탁하면서 한 명씩 늘려갔다. 야외에서 길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구독을 부탁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 궤도는 구독자 1명의 소중함을 그때 깨달았다고 말을 꺼냈다. 지금도 팬들의 인스타그램 DM을 하나하나 답장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콘텐츠 하나를 만드는 데 품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었다. 유튜브 생태계에서는 콘텐츠가 주 3회는 업로드 돼야 안정적이라고 평가 받는다. 그런데 안될과학은 과학을 다루는 만큼 정확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쉽게 전달하기 위해 각종 비유를 짜내야 했다. ‘푸앵카레의 추측’을 정리한 영상은 스크립트 쓰는 데만 7개월이 걸렸고 영상 제작까지 총 9개월 간 공을 쏟았다.
어느 순간 맥이 풀리며 “너무 쉽게 봤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리 잠을 줄여도 다른 채널의 콘텐츠 업로드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4명이서 토크쇼 방송을 하는데 10명도 안되는 시청자가 모였을 때는 좌절하기도 했다. 언젠가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보다 시청하는 사람이 더 적어지면 그때는 정말 관두자고 마음 먹었다. 이쯤 되자 솔직히 과학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채널명도 ‘안될과학’이라며 자조적인 이야기만 쏟아냈다.
안될과학을 심폐소생 한 것은 2018년 10월 공개한 ‘리만가설 한 방 정리’ 영상이었다. 당시 수학자 마이클 아티야가 1859년 제기된 이후 풀리지 않은 가설로 악명 높은 리만 가설의 증명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관심이 높아진 시기였다. 시의성 있는 주제인 만큼 궤도는 한 시간 안에 녹음을 끝마쳤다. 안될과학 팀에서도 밤을 새워 가며 빠르게 편집을 끝내고 콘텐츠를 올렸는데 반응이 곧바로 왔다. 새로고침 할 때마다 구독자가 20명씩 늘어났다. 콘텐츠를 올린 날 구독자 1500명을 돌파하고 그 주에 1만 5000명을 모았다. 궤도는 이때부터 안될과학이 ‘진짜’ 시작했다고 말한다.
축구도 주식도 과학이 됩니다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박사급 아재들이 직접 만든 과학 채널안될과학의 채널 설명 첫 줄이다. 천문학, 전자전기공학, 약학 등 다방면의 전문가가 직접 운영하다 보니 아는 내용을 ‘말’만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오해는 금물.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새로운 과학 소식이 매번 쏟아지는 만큼 ‘아는 것’만 소개하다 보면 금방 바닥이 나기 마련이다. 궤도가 매년 60권 이상의 책을 읽고 매일같이 과학 기사와 논문을 팔로우업하는 이유이다. 대중은 뉴스에 나오는 내용에 관심이 많은 만큼 시의성 있는 주제를 발굴하려고 한다.
축구 채널 ‘달수네 라이브’에선 메시가 드리블을 잘 하는 이유를 CPU 성능에 빗대어 설명했다. 출처 : 달수네라이브
출처 : 달수네라이브
가수 윤하는 역주행 곡 ‘사건의 지평선’ 뮤즈가 안될과학 콘텐츠였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오르트구름’, ‘블랙홀’ 등 이과 감성을 담은 단어를 주제로 명곡을 만들어냈다. 궤도가 바라는 과학이 문화가 되는 세상으로의 한 걸음이다. 출처 : 궤도
특히 궤도는 주제를 찾는 데 있어 의외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에도 과학이?’라는 놀라움과 신선함을 함께 선사할 수 있어서다. 과학과 전혀 무관한 채널에 게스트로 종종 출연하는 이유다. 예컨대 예능 전문 채널 ‘더보기’에서 연애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석하거나 UDT 출신 유튜버 에이전트 H가 운영하는 채널 ‘미션 파서블’에 출연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피지컬:100’의 미션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성공적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유튜브 ‘침착맨’ 채널에 출연한 영상들은 큰 인기를 모았다. 2021년 7월 유사과학을 주제로 한 특강을 시작으로 양자역학, 히어로의 과학, 무협의 과학 등 흥미로운 주제를 선보였는데 그때마다 영상 조회 수가 100만 회는 기본적으로 돌파했다. ‘과학으로 본 주호민의 재즈’ 콘텐츠는 조회 수 308만 회를 기록하기도 했다. 궤도는 ‘2021 침투부 어워즈’에서 3관왕을 수상한 덕분에 인지도가 높아져 2022년에 보다 다양한 방송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궤도는 대부분의 미디어 인터뷰에서 수상 이력을 반드시 언급한다.)
특히 한번 방송할 때마다 최소 5시간은 과학 얘기를 풀어내는 덕에 ‘궤도민수*’라는 별명을 얻어가기도 했다. 궤도는 “시청자들이 과학을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늘 독을 품고 간다”며 “오히려 침착맨님은 ‘그러다 죽겠다’면서 너무 열심히 준비하지 말라고 한다”고 웃어 보였다. 그러나 “과학을 많은 사람들 앞에 알릴 수 있는 무대를 대충 준비하는 것은 인생의 소중한 기회를 버리는 것이라 생각해서 용납이 안 된다”고 결의를 다졌다.
*ㅇㅇ민수 : 침착맨 채널 내에서 방송 분량이 많은 전문가들에게 붙여진 밈.
한편 과학자들과 협업한 전문 방송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 교수, 나사(NASA) 태양계 홍보대사 폴윤 교수 등 저명한 해외 과학자들을 초빙하고 신진 과학자를 발굴하며 전문성을 높이는 데도 열심이다. 다만 궤도는 “안될과학은 대중이 과학을 큰 흐름 속에서 익숙해지게 돕는 역할”이라며 “과학에 관심이 생긴 이들이 보다 전문성 있는 과학 콘텐츠로 넘어갈 수 있도록 오작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세상에 없어선 안 될, 과학
“세상을 바꿀 남자” 궤도가 20여년 전부터 싸이월드 대문 글 및 네이트온 상태 메시지 등 SNS에 꾸준히 써온 문구다. 그가 세상을 바꾸려는 방법은 단순하다. 대중이 과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과학자들의 연구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2012년 궤도가 한국천문연구원에 근무하던 시절 러시아의 화성 탐사선 포보스 그룬트가 발사 실패해 막대한 양의 폭발물을 싣고 지구로 추락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과학자들과 예상 추락 궤도를 계산했는데 예상 추락 범위에 한반도가 포함돼 있었다. 추락 30분 전 제주도를 지나가서 태평양에 떨어졌는데 국내에서는 전혀 이슈가 되지 않았다. 이후 과학 연구에 예산과 인력이 더 투자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변화도 없었다.
궤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밤을 새워가며 연구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투자도 발전도 없을 게 뻔했다. 그는 대중의 무관심이 잘못이 아니라 연구 내용을 충분히 알리지 못한 데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을 더 쉽고 재미있게 알리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궤도가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한 이후의 변화를 그려낸 팬아트 ‘궤도전’의 일부. 출처 : 안될과학 카페
궤도가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한 이후의 변화를 그려낸 팬아트 ‘궤도전’의 일부. 출처 : 안될과학 카페
궤도가 처음 과학 방송을 시작한지 12년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과학이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인공위성 추락 문자 보자마자 하늘 쳐다봤어요” 등 연락을 받을 때면 분명히 바뀌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는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집 앞마당을 쓸기만 해도 온 동네가 깨끗해지는 것처럼, 과학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날수록 세상에 작지만 분명한 변화가 올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세상을 바꿔갈 남자, 궤도다.
인터비즈 조지윤 기자 georg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