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와 반도체 공생 관계 맺어… 공산주의의 확산 막아 냉전 승리 21세기 패권 전쟁서도 핵심 무기로… “中 반도체 독립 성공 땐 질서 재편” 한국 등 동맹국 압박하며 총력전 ◇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크리스 밀러 지음·노정태 옮김/656쪽·2만8000원·부키
“몇 년 전 학교를 때려 부순 장발에 턱수염을 기른 꼬마들이 아니라, 우리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진정한 혁명가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공동 창립자 고든 무어(1929∼2023)가 1973년에 한 말이다. 냉전이 벌어지던 당대 세상을 바꾼 건 “금지를 금지하라”고 했던 ‘68혁명’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혁명’이었다는 얘기다. 요즘은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는 가전기기가 별로 없다. 무어의 말대로 반도체는 삶의 방식을 바꿨다.
라이프스타일뿐일까. 미국 터프츠대 국제사 교수인 저자는 반도체가 현대의 세계사를 결정지었다고 본다. 책은 반도체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계 각국과 반도체 기업의 전쟁사를 미국의 관점에서 조망했다. 100명이 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 정부 관료, 최고경영자(CEO)와의 인터뷰를 통해 반도체가 바꾼 현대의 정치·경제·사회사를 그려냈다.
1980년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왼쪽)와 인텔의 최고경영자(CEO) 앤디 그로브가 악수하는 모습. 아시아 반도체 기업과의 전쟁에서 패배 위기에 놓였던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개발해 마이크로소프트와 동맹을 맺고 퍼스널컴퓨터(PC) 시장을 지배했다. 부키 제공
21세기 반도체 전쟁은 중국과 벌이고 있다. 2020년 미국 상무부는 중국의 정보기술(IT) 대기업 화웨이를 겨냥한 ‘수출 통제 명단’을 발표했다. 화웨이가 미국 기술이 이용된 고성능 컴퓨터 칩을 구입하지 못하도록 수출 자체를 막아버린 것. 이에 맞선 중국은 ‘반도체 독립’을 위해 외국의 반도체 제조사를 인수하고, 자국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의 반도체 독립이 성공한다면 세계 경제를 다시 만들고 군사력의 균형을 재설정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도체 산업이 미중 간 헤게모니 전쟁의 최전방으로 변한 것이다.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왼쪽)가 생전 인텔의 CEO 폴 오텔리니와 대화하는 모습. 인텔은 “모바일 폰을 위한 칩을 만들어 달라”는 애플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훗날 오텔리니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며 자신의 오판을 인정했다. ‘칩 워…’의 저자는 “반도체 전쟁에서 이기는 전략은 시장의 흐름을 읽고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혁신을 이뤄내는 것”이라고 했다. 위키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