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중략)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주고 그날 받은 삯을 /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만났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한동안 그의 몸에 깃든 / 다른 이들의 체온과 맥박을 진정시키느라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덕규 시인(1961∼ )
이 시에 나오는 직업에는 이름이 없다. 농부, 어부처럼 ‘부’ 자로 끝나는 이름도 아니고 의사, 검사처럼 ‘사’ 자로 끝나는 이름도 아니다. 시인은 남을 업어 냇물을 건네주는 일을 ‘직업’이라고 표현하지만 잘 믿기지 않는다. 그런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니. 돈을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니라니. 20년 경력 직장인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직장인의 눈을 감고 시의 눈을 뜨면 생각이 달라진다. 내내 업어주기만 하려는 사람은, 그래서 업어주는 게 아예 업이 된 사람은 없지 않다. 그런 사람은 오늘도 있고, 어제도 있었다. 늘 있고 내내 있었다. 어린 나를 애지중지 키워준 부모가 나의 ‘업어주는 사람’이다. 아픈 나를 보살피는 가족이 나의 ‘업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업혀졌던 내가 다른 이의 ‘업어주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업어주는 사람’의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감사한 일 중의 하나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