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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칼럼]‘자유를 향한 여정’, 내편만 동행할 건가

입력 | 2023-05-15 03:00:00

대통령은 ‘슈퍼乙’… ‘슈퍼甲’으로 비치면 곤란
식견과 결단 좋지만 정서적 공감도 신경 쓰길
산토끼는 언제라도 호랑이로 돌변할 수 있어
균형감 잃지 않고 家長의 심정으로 소통해야



정용관 논설실장


국민은 물론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까지 호명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 다시 보니 생경함이 덜했다. 취임사준비위원회가 준비한 7, 8개 버전의 원고를 물리치고 10여 분간 거의 구술하다시피 불러주며 다시 썼다는 그 연설문이다. 당시 에피소드 하나. 대통령은 연설문 회의에서 성문종합영어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존 F 케네디 취임사 있잖아요.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그런 연설문으로 가야죠”라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취임 연설문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은 잘 알려져 있듯 60여 년 전 케네디의 “나의 동지 세계 시민 여러분(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에서 따온 것이다.

“세계 시민” “자유” “연대” 등을 핵심 키워드로 한 지난 1년 윤 대통령의 주요 연설은 케네디나 ‘자유론’ 등에서 1차 영감을 받아 나름대로 가다듬은 취임 연설문의 변주(變奏)라는 점에서 메시지의 일관성이 있다. 지난해 9월 뉴욕 유엔총회 연설, 올 4월 미 의회 연설, 특히 국빈 방미 기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했던 ‘자유를 향한 여정’ 연설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연설 내용에 얼마나 동의하는지와는 별개로 우리 대통령이 정치 철학과 지향하고 있는 가치에 대해 설파하는 모습 자체를 본 기억이 아득하기 때문이다.

1년 전 취임 연설문부터 최근 방미 기간 메시지까지 짧게나마 되짚어본 이유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 및 연대와 현실적 상황의 간극, 괴리에서 오는 딜레마 때문이다. 대통령이 하버드대 연설에서 강조한 대로 현재 국제사회는 자유와 민주주의 세력 대 독재와 전체주의 세력의 첨예한 대결 구도로 가고 있다. 그러나 미중은 금방 ‘전부 아니면 전무’의 극단적 게임에 돌입할 것처럼 으르렁대다가도 전략대화의 끈을 완전히 끊어내진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계 시민으로까지 시야를 넓힌 자유의 가치가 내치 분야에선 국정 전반이나 정치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한 채 겉돌거나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공정하고 엄정한 ‘법의 지배’가 자유를 보장하는 핵심 기제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자유는 다양성 포용성 개방성을 품고 있어야 다수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자유의 가치가 집권 세력의 독점적 배타적 전유물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좌파와의 이념투쟁 도구로 협소화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년, 검사와 같은 특정 직역을 중용하거나 ‘내부의 적(?)’을 거친 방법으로 걷어내고 당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임 대통령과는 또 다른 느낌의 권위적 이미지가 형성된 측면이 있다.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 결과가 지속적으로 좋지 않게 나오는 흐름을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그 틈에 정권 교체 심판을 받은 전직 대통령은 책방 문을 열어 사람들을 모으고 내로남불의 상징적 인물도 공개 행보에 나섰다. 이들이 기지개를 켤 수 있는 여건을 누가 만들어줬나.

무엇보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자유의 가치를 어떻게 정책기조에 구체화하겠다는 건지, 3∼4년 뒤 대한민국 모습에 대한 중간 목표가 무엇인지, 실현 방법은 뭔지 명확하지가 않으니 정권 교체에 표를 줬던 이들도 고개를 갸웃하는 상황이다. 영어 발음이 좋고 ‘아메리칸 파이’를 잘 불렀다는 것은 잠시 화제가 되고 관심을 환기시킬 수는 있지만 본질적 리더십의 문제는 아니다.

대통령은 주변에 “집토끼부터 잡아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고 들었다. 보수 기반을 확고히 세운 뒤 중도로 나아가야 한다는 ‘우파 진지전’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좌파 진지와 우파 진지의 협소한 대치를 뛰어넘는 리더십과 통치술을 보일 때 정권 교체에 힘을 실어줬던 중도층의 마음도 움직일 것이다. 산토끼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언제든 호랑이로 돌변할 수도 있다.

집권 1년을 넘기면서 대통령의 ‘스타일’에 큰 변화가 오기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적잖게 들린다. 최고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균형감이고, 밸런스를 취하려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신뢰를 얻는 길이다. “현재와 과거를 서로 경쟁시킨다면 반드시 미래를 놓치게 될 것이다” 등 훌륭한 말을 인용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처한 딜레마, 고민과 비전, 해법, 그 이유에 대한 친절하고 소상한 설명이 필요하다. “행복은 자유에 달려 있고, 자유는 용기에 달려 있다”며 일찌감치 자유를 강조한 사람은 아테네를 부흥시킨 페리클레스다. 그는 “식견은 있으나 그것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생각이 아예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슈퍼갑’이 아닌 ‘슈퍼을’의 자세, 가장(家長)의 마음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다. 최고의 홍보맨 역시 대통령 자신이니까.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